삶의 진실을 찾아서
맹목적 신앙의 비진리성 본문
기독교인들은 사도바울의 유일신앙의 교리를 받아 기독교만은 모든 종교 중 유일하게 하느님의 성령이 직접 내려오는 선택받은 종교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 있는 은혜의 종교라 한다. 따라서 아무리 죄가 많아도 하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길잃은 양을 일일이 구해주는 목자처럼 반드시 구원을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증거는 성령의 은사로 내려오는데 이를 체험하지 않는 한 지식으로 기독교를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세상에 나타나는 성령현상이 창조주 하느님의 영일까? 만약 그 성령이 예수님의 지적대로 진정한 구원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성령체험의 은사와 구원의 논리는 그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다.
사실 성령 현상이 활발했던 것은 유대교였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에게 모든 것을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민족신인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그들의 최대 과제였다. 그들은 때마다 빠지지 않고 여호와에게 제물을 바쳤으며 여호와는 수시로 성령으로 나타나 그들 민족을 흠뻑 적시며 계시를 내렸다. 그러나 여호와는 유대사회를 밝게 만들지 못했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유대 민족을 구하지도 못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구원만 믿고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않았으며 위선적으로 많은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심과 정의가 사라진 유대사회는 어둡고 나약해졌으며 결국 나라를 잃고 세상을 떠도는 유랑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가 모든 일을 주관하고 성령이 가장 많이 나타났던 이스라엘이 왜 망했을까? 그 이유는 그곳에 나타난 성령이 창조주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영이 아니라 세계 각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고 있는 일반적인 지역신의 영적 현상과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세상이 어둡고 무지할 때나 나라가 망할 때 심령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현상이 많이 나타나는 나라를 미신과 무지가 넘치는 후진국으로 본다. 과거 유대민족에게 성령이 많이 나타난 것도 바로 이와 같이 망하고 있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미신현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어둡고 불행한 사회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이다. 그분은 망한 나라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유대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보았다. 사람들은 욕망과 이기심으로 양심이 없었고 사회는 부패했으며 종교는 미신으로 넘쳐났다. 제사장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불합리한 신의 뜻을 핑계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바른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서로 불신하여 헐뜯었다. 그리하여 로마의 압제와 신의 횡포 속에 갈길을 잃고 헤매는 유대민족을 보고 예수님은 황야로 들어가 그들을 구하겠다는 애끓는 마음과 끝없는 사랑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구원을 갈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큰 뜻과 사랑에 마침내 사사로운 자기를 모두 불사르고 완전하고 성스러운 영혼을 얻어 완전한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보게 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사회에 인류사에 자랑인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완전히 보시는 성자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성자가 되신 예수님의 앞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완전한 세상과 진리가 놓여있었다. 그곳에는 맑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과 인간이 가야할 길이 분명히 있었고 천국에 가는 구원의 길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유대교에서 말하듯이 신을 무조건 섬기고 성령을 받기만 하면 되면 무지한 방법이 아니었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이라도 자기 구원만을 위해 겉으로 형식적인 기도를 하고 속으로는 나쁜 짓을 하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자들을 구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여호와가 유대민족만 책임지는 민족신이라면 편파적으로 그럴 수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이 세상과 인류 모두를 책임지고 통할하는 신이라면 모든 인류에 대해 공정하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에는 인간을 복되게 하는 진리가 없었으며 오직 신만 잘 섬기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할 도리를 안하고 구원만 바라며 위선적으로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고 꾸짖었던 것이며 “주여! 주여! 하며 나를 섬기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신 것이다. 율법을 지켜 양심을 회복하고 신이 아닌 인간이 주체가 되어 진리를 실천하고 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고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것이 기존 유대교의 교리와는 다른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무조건 하느님을 섬기고 성령을 영접하라고 했다면 그분은 인류사의 4대 성인으로 존경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이 존경받는 것은 유대교의 신본주의 교리처럼 신을 무조건 믿으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최초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보고 하느님이 정해놓은 참된 구원의 길과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셨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신을 믿고 성령을 받으라는 유대교의 구원논리와 인간의 도리와 양심을 회복하고 진리를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구원논리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분은 기적과 같은 방법으로 무조건적인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구세주를 출현시켜 유대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하고 지상천국을 건설하게 해준다는 희망은 유대인들의 광신적 믿음이 만든 과대망상증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정해놓은 완전한 구원의 법칙은 있어도 신이 인간 세상에 직접 개입하여 기적의 구원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완전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회를 주고 그 행한 결과에 따라 완전하게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이치에 맞는 엄격하신 가르침은 기적과 허황된 구원을 바라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는 구세주라 하면서 현실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듣기 싫은 진리만 이야기하며 자신들의 잘못만 지적하는 예수가 진정으로 미웠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로마관원에게 넘겨 십자가에 처형시킨 것이다.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진정한 하나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짓 신의 꾀임에 빠져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잔을 다른 곳에 돌려달라고 호소하시다가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분의 능력은 살아있을 때 제사장이나 로마군사 한사람의 힘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죽음의 현장에서도 자신을 구해내지 못했다. 이것이 역사상 나타난 예수님의 실제 모습이니 살아있을 때 구원의 기적을 행하지 못한 분에게 죽은 영을 통해 기적의 구원을 바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성자가 나타나 기존 유대교의 맹목적인 믿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참된 진리와 인간의 길을 밝혔지만 그 가르침은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고 죽음과 동시에 다른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세속적 한계 속에서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 주요한 이유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관계로 가르침의 기간이 3년반 정도로 매우 짧아 제자들이 유대사회에 처음 나타난 진리의 세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사후에 남은 제자들은 무엇을 가르칠 지 막막했다. 개인적 자질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제자들은 대부분 진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약했다. 그들의 예수님과 진리에 대한 이해정도는 제일제자인 베드로가 닭이 우는 아침까지 예수를 3번이나 부정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뉘우친 제자들은 각자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기초로 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주류적인 움직임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들은 12사도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유대사회에 한정되어 있었고 로마로부터 정치적으로 탄압받아 얼마가지 않아 그 세력이 붕괴되고 말았다.
두 번째는 바울에 의해 이끌리던 신앙 위주의 교리였다. 사도 바울은 살아 생전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속사도로서 예수님이 돌아가신후 성령으로만 예수님을 영접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진리에 대한 생생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고 정신적인 깨우침도 없었다. 오직 성령으로만 접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기존에 자신이 믿던 유대교의 여호와와 같은 영적 존재와 똑같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과거에 자기가 믿었던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신으로 믿고 성령을 받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원시신앙으로 기독교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리가 빠진 맹신적인 교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배운 12사도의 교리와 정면으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울은 거짓 교리를 전한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해외전도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불행 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이것이 기독교 세계화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당시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다수의 신도들은 어렸을 때부터 유대교의 영향력 속에 살아온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가르침이 없어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말로만 전해들은 예수님의 위광과 신화에 열광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맹신적 교리에 쉽게 교화되었다. 또한 기독교가 로마로 뻗어나가면서 그 주된 선교대상이 바로 아녀자나 노예, 하층계급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진리를 밝히고 정신을 깨우는 이성적 가르침보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원시신앙이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단순한 믿음과 무조건적인 구원의 교리는 당시의 정치적 본산이었던 로마사회에 급속히 세력을 넓혀나감으로써 이 흐름이 기독교의 주된 세력이 된다. 그래서 속사도인 바울의 영적 교리가 현실적인 세력을 얻어 직계제자인 12사도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진리의 교리를 누르고 오늘날 기독교의 근본교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직계제자들의 모습은 거의 없고 속사도인 바울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후세의 세력다툼에서 맹신적 신앙 위주의 바울파가 승리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교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알지 못하는 신의 뜻에 의지하는 맹신적인 유대교의 허구를 지적하며 다른 성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 에 정해져 있는 진리의 길을 유대사회에 밝혔다. 그런데 예수님을 성령으로 만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배제하고 다시 유대교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으로 회귀함으로써 진리의 종교를 저급한 원시종교로 변질시킨 것이다.
예수님은 우상숭배를 매우 싫어하셨다. 또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러 오셨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자기를 섬기는 것을 절대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의 신들이 구체적인 구원의 길이나 인간세상을 밝게 만드는 진리를 제시하지도 않은 채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구원을 미끼로 인간을 종으로 부리고 있는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 하셨다. 그리하여 매일 제사를 지내며 성령을 받아 신의 계시를 전한다고 위선을 떨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고 꾸짖었으며 말로만 하나님을 외치지 말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알지 못하는 신이 주인이 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어두운 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진리를 실천하며 지은대로 살아가는 최초의 인본주의를 주장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러한 진리를 배제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는 유대교식의 맹목적인 원시신앙으로 기독교를 되돌아간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자리에 예수를 앉히고 예수를 진리의 스승이 아니라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 살아있을 때는 자신을 저버린 무지한 인간들이 진정 소중한 자신의 가르침은 외면한 채 죽은 자신을 우상으로 삼아 죄많은 자신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물로 삼으며 이를 이용하여 재물을 챙기는 현실을 보시면 실로 통탄해 하실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교리는 인간을 일깨우는 진리나 이성과는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교리였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로새 2:8)고 하여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진리가 사라진 맹목적인 원시 신앙론이 세력을 얻어가자 기독교는 그동안 소크라테스 이래 축적된 그리스 로마문화의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을 누르고 서구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이러한 신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해결해준다는 단순하고 편리한 관념은 전제 왕권의 통치에 매우 유용했다. 그리하여 로마황제는 세상의 인심을 하나로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국가와 신민을 통제하고 신의 이름으로 자의적인 독재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여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권력으로 교리를 하나로 통일하고 교회에 세속적 권력을 주어 자신은 그 수장이 됨으로써 교회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만들어진 역사인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이 온다는 말도 안되는 맹목적인 믿음이 유럽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도 바울에 의한 기독교의 맹신적인 원시종교로의 회귀는 유대민족과 인류사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세상을 밝히고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위대한 진리가 사라짐으로써 유대민족은 위대한 민족, 강한 국가가 될 희망이 사라지고 유랑민족이 되어 세계를 떠돌게 되었으며 무지하고 불확실한 신의 지배 속에 들어간 유럽사회는 천여년간 암흑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서구학자들은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지배하던 약 천년간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중세 유럽사회에는 세상을 밝게 하는 진리와 인간의 도리를 일깨우는 이성이 사라지고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신의 뜻을 대변하는 교황에의 복속, 그리고 이를 이용한 황제와 봉건세력들의 전제적인 통치만이 남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신의 뜻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곧 교회와 사회지배층의 자의적인 권력행사와 부패로 이어졌다.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과 신을 빙자한 전제적 권력 및 부정부패는 마침내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로 이어져 종교개혁의 계기가 되고 암흑의 중세를 스스로 끝나게 하는 단초를 스스로 제공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서구문명이 세계문화를 지배하게 된 이유가 기독교의 진리성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 이러한 암흑의 질곡을 깨고 서구문명을 발전시킨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었다. 기독교의 불확실한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맹신은 사회의 발전과 인간이 가능성을 가로막은 최대의 암초였던 것이다. 학자들은 서구문화가 낙후된 암흑시대를 깨고 당시 선진국이었던 동양사회보다 앞지르게 된 시기를 맹신의 어둠을 뜷고 인간의 이성이 발휘되기 시작한 14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로 보고 있다. 천여년간 로마 카톨릭의 신본주의 권세에 암흑기를 보내던 유럽사회는 르네상스를 거쳐 문예부흥과 인본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신본주의와 절대적 교회권력이 야기한 부패에 대한 반발로 인간이 주체가 되는 인본주의적인 개신교 신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이어져 지금 세계사를 지배하는 서구 선진사회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리가 없고 맹신만 있는 비이성적인 신본주의 종교는 유대사회를 망쳤고 중세 유럽을 암흑기로 망쳤으며 인간성 상실을 가져왔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이 발달하고 과학적 지식이 늘어나면서 신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인간은 그 신의 종으로 살아야 하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의 계시와 성령의 임재를 바라며 비이성적으로 살라는 신본주의 교리는 이제 미신으로 결론이 나 기독교의 본고장인 서구사회에서 생명력을 다한 상태이다. 무지막지한 신의 권위로 인간을 종으로 부리는 신본주의 노예사상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요즘 서구에서는 기독교는 단순한 전통적 관습으로 변하여 교회는 일생에 3번(세례, 결혼, 장례)간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오고 있으며 신자가 없어 박물관이나 집회장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다시 성령현상이 일어나 여러 개척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개신교와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질적으로 다르다. 서구의 개신교는 신본주의로 인한 인간성 억제와 교황의 절대권력이 야기한 부패에 대한 반발로 진리와 이성을 고취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지만 한국의 개신교는 이와 반대로 미신적인 성령현상에 의한 광신적인 신본주의에 다시 빠지자는 흐름인 것이다. 이들은 우리나라에 성령이 많이 임재하는 이유가 유대민족 대신 한국민을 다시 선민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아전인수적 해석을 한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성령현상은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의 현현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신성이 강한 것이다.
즉 우리나라의 불같이 일어나는 성령현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기 보다는 불행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 범람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무당현상을 기반으로 나타나고 있는 미신적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개척교회의 부흥목사들 중에는 구세주를 자인하는 이단아들이 많은 것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성령현상을 일으키며 신자들을 모으고 있는데 그들이 일으키는 성령현상들은 한국의 무당들이 일으키는 심령현상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미신적인 성령현상에 의한 기독교의 성장은 기독교의 입장에서도 좋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기독교도 망치고 사회도 망치게 된다. 이미 서구역사에서 증명되었듯이 광신과 미신이 내포된 종교는 향후 더 큰 반작용으로 다가와 교회의 존립자체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요즘 교회에서 객관적인 진리와 인간의 이성을 버리고 오직 성령을 영접하여 그 종이 되어 신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신본주의 주장은 이미 거짓으로 판명한 고려장같은 퀘퀘묵은 소리이다. 바른 이치와 이성의 분별이 사라진 불확실한 신의 계시는 세상을 다시 무지와 암흑속으로 몰아넣을 것이고 신의 뜻을 행사하는 자의적인 교회권력은 신자들의 희생 과 고통 속에 비대해져 사회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깨어나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참 뜻을 되새기며 성령 현상의 위험성을 깨닫고 올바른 이성과 진리로 되돌아와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진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천여년간 종교의 암흑에서 헤맸던 서구의 전철을 오늘날 다시 되풀이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완전한 진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정체를 알지 못하는 신을 갈망하며 불확실한 신의 뜻과 성령현상에 의존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예수님의 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여! 주여! 하며 예수님을 외치지 말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인 진리를 행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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