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신본주의 인본주의 본문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가 죄많고 어리석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어기고 교만한 지혜를 내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원죄가 있는 나약한 존재로서 결국 신을 찾게 되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품안에서 그분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신이 세상의 주인이며 인간은 신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부속물로서 신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신본주의라고 하고 신이 만들어놓은 완전한 뜻과 진리에 따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신과 같은 완전한 능력과 인격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한다.
똑같이 조물주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입장은 같은데 신본주의는 신의 불확실한 뜻과 계시에 의존하는 입장이고 인본주의는 성자들이 밝힌 절대선과 진리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또 신본주의는 신이 자유자재로 나타나 자의적으로 뜻을 펴고 자신이 원하는 자를 선택하여 구원한다는 입장인 반면에 인본주의는 신은 함부로 나타나지 않고 진리로 나타나며 완전한 결과로 심판하신다고 본다. 왜냐하면 완전하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는 이 세상을 조금도 흠이 없이 돌아가도록 완전한 질서와 이치로 만들어 놓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완벽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세상사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으며 개입할 수도 없다고 본다. 만약 조물주가 자신이 만든 완전한 이치에 따라 이루어지는 세상일에 개입한다면 그런 하느님은 불공정하거나 편협한 하느님일 것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세상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개입하는 전지전능하지 못한 신이기 때문에 믿을 필요와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은 쉽게 세상에 나타나지 않으며 나타날 때도 완전한 진리로 나타나며 결과로서 완전하게 심판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신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신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데, 그들이 믿는 신이 과연 창조주 하나님인지 어떠한 존재인지, 그 뜻이 무엇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난 많은 계시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엽적이고 사소한 일이었으며 많은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킨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영원한 진리이며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성서에 하나님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모든 답을 마련해 놓았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은 기도와 성령을 통해 생활 속에서 그 길을 하나하나 깨우쳐 주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막연한 주장은 현대인들의 삶의 길잡이가 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맹신적인 기독교인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급속히 흘러가는 긴장된 삶 속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가르침도 없는 상황에서 막연한 기도와 계시만을 기다리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일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신에 의지하여 성령의 계시대로 산 대표적 신본주의 국가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신의 뜻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 나타난 자 중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아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죽였을 정도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기는 힘이 든 것이다.
실제 역사에 있어서도 세상을 구하거나 진리를 밝힌 창조주 하나님의 성령은 없었다. 유대교에서 성령의 비가 쏟아졌지만 유대민족은 망했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섬기기 시작한 중세 유럽사회는 천여년간 무지몽매한 맹신 속에 문명이 사라지고 인간성이 말살되는 암흑기를 보냈던 것이다.
중세 봉건시대에 나타난 성령 중에도 창조주 하나님에 어울리는 거룩한 역사를 하신 적은 없다. 병약한 시골처녀에게 성령이 나타나 그 모습을 보이거나 마리아상이 피를 흘리는 정도가 대표적인 성령현상일 뿐이다. 영불전쟁 때 주하나님의 예언자이며 흰갑옷의 투사라고 불리우는 프랑스의 성녀 잔다르크가 성령의 계시를 받고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녀 역시 상대방인 영국에서는 마녀로 보아 화형을 처했던 문제가 많은 성령이었다.
그리고 신의 대리자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던 무오류의 교황이 있었지만 그분 또한 제대로 신의 뜻을 알려준 적이 없다. 그리하여 신의 뜻과 이름으로 수많은 대사를 치렀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십자군 파병과 면죄부 판매사건이었다. 십자군은 야만국에 신의 뜻을 전하고 성지를 회복한다는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 알라신에 대한 열정과 순박함이 넘치던 아랍국가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신의 뜻을 절대적으로 행사했던 교황청의 부패로 인해 죄를 사해준다는 면죄부가 판매되어 결국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고 신교가 일어나 중세가 종언을 고하고 인본주의가 대두되는 종교개혁이 일어남으로써 현대 서구문명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알 수 없는 미지의 신과 불확실한 신의 뜻을 맹목적으로 믿고 의지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말도 안되는 비이성적인 관념이 지배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인 것이다. 이러한 무지한 신앙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신화가 지배하던 고대사회에는 통용될 수 있는 논리였지만 지금과 같이 사람이 달나라에 오고가고 모든 것이 실시간적으로 인과관계가 분석되는 현대에 있어서 미지의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주장인 것이다. 그래서 불확실한 신의 계시에 의존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미 서구사회에서 그 정당성을 상실한 지 오래이며 사람들은 기독교를 단순한 전통과 관습으로 형식적으로 지키며 일상의 삶은 개인의 이성과 보편적 이치에 근거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의 성령이라면 구약에 나타난 대로 그 은사가 실로 엄청나야 한다. 칠일 만에 세상을 창조하고 모세와 같이 홍해를 가르며 인간의 길을 밝히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모든 병을 한 순간에 낳게 하는 절대적인 치유능력을 지니며 세상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무소불위의 권능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는 성령현상은 어떠한가? 그것은 잡령의 심령현상 수준으로 매우 유치하고 조잡하다. 단체로 엑스타시에 빠지고, 사사로운 개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이따금 요행으로 병을 고치며, 알지 못하는 말로 방언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현상은 다른 종교나 무당의 접신현상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왜 이런 혼란스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예수님이 지적했듯이 이 세상에 흔히 나타나는 성령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하나님을 흉내내는 유대의 민족신이거나 잡령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해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신에게 기도하듯이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깨우치며 “창조주 하나님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충고하시는 구절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성령현상으로 나타나는 영들이 진정한 자비와 진리의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라면 신의 노예가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거룩하고 신성한 영이 인간에게 해를 끼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대 유대사회를 지배하던 유대의 조상신이거나 세상을 떠도는 잡령이라면 참으로 비극적인 일인 것이다. 사탄의 교묘한 술수에 속아 스스로 자신의 몸을 바쳐 귀신의 밥이 되는 어리석은 일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구원은 커녕 자신의 영혼을 망치게 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가족과 세상을 망치는 잘못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나타나는 성령현상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여기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든 완전한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어둠의 세력인 사탄의 음모가 숨어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할 때 자신의 모습을 똑같이 본 따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자신의 분신인 인간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자신과 같이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속성을 똑같이 부여하여 자신과 같이 만드신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의 참된 모습이다.
그러나 사탄의 세력인 고대신들은 인간을 축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폭군처럼 인간을 지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간이 무지한 상태에 머물며 종으로 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나타나 신비와 공포로서 인간의 섬김을 받으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이것이 각 지역에 나타나 인간의 섬김을 받고있는 고대신들의 정체인 것이다.
고대신들은 대개 그 민족과 관련된 조상신들이다. 이들은 자기 민족과 관련된 집착으로 죽어서도 자기 민족을 떠나지 못하고 세상을 맴돌며 유혼의 상태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민족에 관한 일이면 불합리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편파적이고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이 맺혀 떠도는 욕망과 집착을 가진 저차원의 신이기 때문에 또한 인간들이 제사와 제물로 자신을 섬겨주기를 원하며 인간을 지배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신들은 생명의 질서에 벗어나 세상을 떠도는 유혼에 불과하기에 외형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사칭하지만 그 내면은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잔혹한 귀신의 모습을 지닌다. 이것이 구약 속에 나타나는 유대민족신인 여호와의 이중성인 것이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는 완전한 창조주로서 신성하고 완전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 속성이 저급한 유혼에 불과하므로 조잡하고 이기적이며 잔혹한 면이 여기 저기서 모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의 마르시온파는 이러한 구약의 분노의 하나님과 신약의 보편적 진리의 하나님과 분리하여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하급신들은 몸이 없는 의식적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하는 일이라고는 생각에 빠지는 일 밖에 없으며 무제한의 의식의 자유에 노출된다. 그래서 유혼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의식과 환경과의 접촉에 의해 끝없은 환상과 꿈에 빠지게 된다. 산 사람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생각이지만 의식만 남은 영혼들에게 이것은 삶이며 실제인 것이다. 그리고 떠도는 유혼들은 원한과 욕망과 집착이 가득한 저급한 영혼이기 때문에 그들이 빠져드는 환상은 대부분 악몽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지옥과 같은 환상에 시달리며 그 영혼이 갈라지고 소멸하는 고통에 빠진다. 그래서 비오는 날에 공동묘지에 가면 귀신들의 울부짖는 호곡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산지옥, 화탕지옥이란 바로 그러한 유혼들이 빠지는 고통스런 악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떠도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사람의 몸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몸이라는 보호막이 있으면 산 사람과 같이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의식의 안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아들이라고 음모를 꾸미는 신들의 속셈인 것이다. 성령영접이라는 그럴 듯한 미명 속에는 떠도는 귀신들이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와 아지트로 삼고 살아있는 인간세상을 지배하려는 사탄의 세계의 음모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이러한 진실을 모르고 무조건 겁에 질려 신들을 섬기고 제물을 바치며 몸을 열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인간이 진리와 이성에 의지하여 살아가라는 진리가 퍼져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본주의 종교에서 성령현상을 강조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신들의 음모가 극적으로 잘 나타나있는 종교가 유대교이다. 유대의 신들은 계시를 통해 인간들이 자신들을 잘 섬기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지혜를 막는 구절을 성경 속에 삽입해 놓았다. 구약성경에 보면 인간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신들의 음모가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있다. 유대의 신인 여호와는 사람들에게 이런 지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창세기 2:16, 17)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만족할 만큼 먹어도 좋다. 그러나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 유대신인 여호와는 인간의 지혜가 깨어 진실을 앎으로써 인간이 신에 의지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항상 자신을 섬기며 종으로 머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유대인의 고대 전설과 맹목적 신앙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모순과 비합리성이 존재한다. 여호와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모든 것이 완벽한 질서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을 유혹하는 뱀을 미리 에덴동산에 만들어 두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며 모순인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나타난 이유는 구약에 나온 태초의 모습이 창조주 하나님이 만든 완전한 세상이 아니라 인간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신들의 입장에서 설정한 구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혜를 갖고 완성되고자 하는 갈망을 뱀으로 표현하여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어 지혜가 생겨나 하나님과 같이 똑똑해지면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와 뱀은 고대인들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온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다툼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민 사탄의 세력들은 자신을 섬기는 인간에게는 성령으로 나타나 섬김을 받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인간들에게는 공포를 주어 인간을 지배해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대부분의 고대신들은 자비의 신이 아니라 편협하고 이기적인 폭력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러한 세상을 속이는 저급한 신들의 술수에 넘어가 기이한 영적 현상을 나타내는 잡령들을 하나님으로 착각하여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교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다수의 유대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라는 증거는 구약 속의 하나님이 엘로힘이라는 복수로 나타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여호와를 지칭할 때 엘로아(신)라는 단어의 복수 형태인 엘로힘(신들)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이 복수 형태가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힘의 충만함, 하나님의 능력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천년 후에 사도 바울이 만든 삼위일체설을 구약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을 리가 없는 것이며 문법상 능력 전체를 표현한다는 이유로 인칭의 복수를 쓸 이유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여호와를 복수로 지칭하는 것은 말로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을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수없이 나타나는 신들을 성령으로 받아 모시다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다수의 신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그 원인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신에 대한 자신들의 정성이 부족함으로 생각하여 더욱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마침내 인간의 주체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완전한 신의 노예가 되어 자식까지 제물로 바치는 광신적이고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무지몽매한 모습으로 극단적인 신본주의로 인해 바른 이치가 사라지고 인간의 이성이 마비됨으로써 결국 나라가 패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을 파멸에 빠뜨린 비진리적이고 편협한 유대신이 어떻게 기독교를 지배해 나갔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은 진리를 깨치시고 고향에 돌아와 불확실한 신을 맹목적으로 광신하며 인간의 도리를 행하지 않고 있는 타락한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꾸짖으며 진리와 인간의 길을 가르쳤다. 그러자 유대의 신들과 그 부림을 받는 제사장과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의 진리가 세상에 번져가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맹목적으로 신을 섬기지 말고 뿌린 대로 거두는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불변의 진리가 세상에 널리 퍼져 사람들의 지혜가 커져나가면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인간을 지배하던 자신들의 허구가 탄로나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수를 고발하여 로마관원에게 거짓 선지자 행세를 하는 예수를 죽이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과 성령의 뜻으로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더욱 사악한 것은 로마의 빌라도 총독이 예수가 죄가 없음을 알고 유월절 특사로 그를 방면하려고 했으나 유대의 제사장과 유대인들은 극악한 죄수인 바라바를 용서해주고 오히려 예수를 죽이라고 다시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두려워한 여호와의 정체인 것이며 그러한 신의 뜻을 따르는 유대민족의 사악하고 무지함인 것이다. 이처럼 알지 못하는 신의 뜻은 매우 위험하며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사탄의 세력인 떠도는 귀신들의 최대 적이었던 진리의 예수가 죽고 나자 사탄의 세력들은 예수를 이용하여 귀신의 지배를 세계적으로 확대해 나가고자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제물로 삼은 것이 사도 바울이었다. 본래 바울은 독실한 유대교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로 스테판과 같은 제자들과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는데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유대의 신들은 바울에게 예수님의 성령으로 변장하여 나타나 그의 눈을 멀게 하여 공포와 경외감을 주어 다시 유대의 신을 모시듯 예수님을 신으로 모시고 그 성령을 받으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신을 섬기고 성령을 받게 하면 세상을 떠돌던 어둠의 유혼들은 모두 성령으로 화하여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 편히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신들의 지시에 따라 예수님이 살아생전 가르쳤던 진리적 가르침을 폐하고 자신이 믿어왔던 유대교처럼 여호와와 예수님을 섬기고 그 성령을 받으면 구원이 온다는 교리로 기독교를 변질시켜 전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맹목적인 믿음과 무조건적인 구원이라는 원시신앙적 교리는 당시 고통에 시달리고 있던 유대인들과 로마의 하층민들에게 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여 급속히 세를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독교 내부의 세력을 잡은 바울은 베드로를 비롯한 정통제자들의 가르침을 제압하고 자신의 교리를 기독교의 정통교리로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신약 성경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열두제자의 가르침은 거의 없고 속사도인 바울의 가르침이 대부분인 것은 바로 이와같은 초기 기독교내의 교리와 세력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유대신의 사도가 되어 예수님이 밝힌 고귀한 진리의 가르침과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폐기하고 오직 신들만이 전지전능한 권세를 누리는 신본주의 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민족의 신이었던 여호와가 창조주 하나님으로 변신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의 유일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대신들과 사도 바울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맹목적인 원시신앙 형태인 기독교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진리의 사도가 아니라 진리를 폐기하고 인간세상을 신들의 지배하에 두고자 했던 사탄의 사도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만약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가르친 진리는 사라지고 자신이 우상의 되어 신들의 배를 불리는 수단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신다면 실로 통탄하실 것이다.
그럼 여기서 당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났던 예수의 성령이 과연 예수님의 영이었는지 아니면 유대의 하급신들이 변하여 나타난 것인지 생각해보자.
예수님이 영이 되어 세상에 나타날 수 없는 첫째 이유는 예수님은 당시 유대의 신과 성령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부모보다 더 극진하게 섬기며 매일 성령의 세례 속에 살았지만 결국 위선과 죄악 속에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호와를 맹신하며 성령에 젖어사는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고 꾸짖으며 “말로만 주를 외치지 말고 주의 뜻을 행하라!” 했던 것이다. 진정한 구원과 지상천국은 하나님을 섬기고 성령을 받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양심과 정의를 지키고 열심히 진리를 실천해야 온다는 것을 분명히 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나타나 유대인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바라는 방법이 아니었으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성령을 영접하기 보다는 당신이 가르친 진리를 열심히 실천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둘째 성자들은 귀신이 되어 떠돌지 않는다. 성자들은 우주에 나타난 생명체들 중 완성에 도달한 우주의 정화이며 인간완성의 희귀한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음은 완전한 신성에 이르러 오직 사랑과 진리만이 남은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좋아하거나 미워하거나 간에 모든 인간들이 진리를 깨우쳐 오직 잘 되기만을 축복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의해 자기가 죽음을 당하더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점 거짓이나 부족함이 없고 자신의 할 도리를 다했기에 그 마음에 아무런 한과 집착이 없으며 오히려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만이 남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하시면서 무한한 자비와 안타까움 속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여한없이 떠나가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런 분이 무슨 원한과 집착이 있어 유혼이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죄많은 인간들의 몸에 들어와 머물겠는가?
또한 높은 차원의 영들은 이 세상에 머물며 심령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혼이 탁한 세상에 머물며 은원관계에 집착하여 심령현상을 일으키게 되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영혼의 기운을 모두 써버려 그 영혼이 파괴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곡식의 열매와 같다. 깨의 경우 이를 수확하여 온전히 보존하지 않고 기름을 짜내버리면 그 깨는 다시는 자기를 낳지 못하고 쭉정이가 되어 죽어버리게 된다. 이처럼 영혼도 저 세상으로 떠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돌면서 자기의 뜻을 펼친다고 억지로 심령현상을 일으키면 자신의 진기를 다 소진하여 마침내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성자가 귀신이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는 말은 없다. 모든 성자들은 살아있을 때 세상을 위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여한없이 자신을 바치고 갔기에 죽어서도 아무런 원한이나 집착없이 높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편히 지내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성령의 모습으로 이곳저곳 나타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산자는 산자를 따르라고 했다. 그런 분이 죽은 자의 길을 가지 않고 생명의 길을 어긴 채 산자 곁에 남아 살아있는 듯 심령현상을 일으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셋째 세상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성령현상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기에는 매우 유치하고 조잡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성령이라면 진리를 밝히거나 생명을 창조하거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위대하고 거룩한 은사를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성령현상이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몸이 진동하며 뜨거워져 엑스타시를 느끼며, 빛이나 신이 모습이 나타나 몸으로 들어오고, 갑자기 모르는 방언을 하거나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지식을 읊조리며 이따금 치유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주종인 것이다. 이러한 영적 현상들은 다른 종교나 무당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심령현상이니 그때 사도 바울에게 나타났던 성령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일반적인 유혼들이 변장하여 나타난 모습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오늘날 성령이 나타나는 모습을 살펴보면 성령이 주로 나타나는 대상이 심신이 극도로 쇠약하여 제정신을 놓아버릴 상태의 사람에게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출현하시는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진정 창조주 하나님의 성령이라면 심신이 허약하거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은 자의 육체를 빌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헌신적이고 사명감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위인들의 몸을 통해 당당한 방법으로 나타나 세상을 구하는 위대한 은사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타나 은사를 베푸는 것도 문제가 많다. 이 우주를 창조하신 엄청난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신자가 기도한다고 해서 개인적인 사사로운 기복을 들어주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개인적인 치병과 한풀이는 과거 조상신이나 무당들이 주로 했던 영적 활동과 동일한 현상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모든 것을 공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자신이 만든 완전한 질서와 이치를 어기고 죄많고 더러운 개인의 몸에 일일이 들어와 세상을 위한 일이 아닌 사사로운 청탁을 들어주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잡신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라면 스스로 자신이 필요한 자를 점지해서 나타나 주체적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여 인류에게 거룩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은 부흥가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부흥가들이 원하기만 하면 무당이 신을 부르듯 어느 때나 달려와 자신을 나타내고 부흥가의 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현상이 신자들의 재산을 뺏아 거대한 교회를 만들고 부흥가들의 명예와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도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라기보다는 유대의 저급한 고대신이거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유혼의 영적 장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처럼 진리도 없고 자비도 없는 저급한 신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을 흉내내어 인간세상을 지배하려 했으니 그 결과는 자명했다. 신본주의 종교의 무지막지한 비진리성과 비이성성은 서구사회에서 암흑과 패망의 역사로 증명되었던 것이다. 바른 진리가 없이 무지몽매하게 신만 모시던 유대민족은 인간의 양심이 사라지고 사회정의가 붕괴되어 결국 위선적이고 나약한 나라가 되어 멸망했으며 중세의 기독교는 찬란했던 그리스 로마문화의 진리성과 인간의 이성을 파괴시켜 유럽을 천여년간의 암흑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이용하여 맹목적인 믿음과 무조건적 구원이라는 교리 하나로 인간세상을 지배해온 기독교의 거짓된 역사이며 신본주의의 정체인 것이다. 그들은 신에 씌여 인간이 진리를 깨닫고 인간완성을 위해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는 것을 교만하고 가치없는 일로 치부하며, 신의 종이 되어 신이 시키는대로 사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길이며,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신을 위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더 나은 자기를 얻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인간 또한 스스로 주체가 되어 더 좋은 자기를 만들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원리에 부합되는 일인 것이다. 사람은 삶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좋은 원인을 지어 자신의 영혼을 살찌운다. 이러한 자신이 지은 모든 삶이 자신의 영혼 속에 기록되어 인간완성을 이루고 구원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삶인 것이다.
그런데 신본주의자의 말처럼 자신의 몸 속에 성령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그때는 자신의 몸의 주인인 자기의 영혼은 사라지고 신의 영이 자신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진정한 성령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말처럼 성령으로 변장한 잡령일 경우 자기의 몸을 귀신에게 헌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삶과 존재이유가 사라지고 오직 신의 삶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인간의 영혼은 수면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영혼은 더 이상 성장을 멈추고 유약한 상태가 되어 죽으면 자신 몸에 들어온 신의 노예가 되어 함께 귀신으로 떠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싫으나 좋으나 자기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아무리 나쁜 삶이라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사는 삶이 좋은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아무리 빈약한 농사라도 자신의 영혼 속에 자기가 지어야지 다른 영이 들어와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신놀음을 한다면 자신의 농사는 헛짓는 것이 되며 태어난 이유와 보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신을 받아들이는 경우의 위험성인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며 완전한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에 나타나 떠돌지 않으니 서구사회에서 종언을 고한 비이성적이고 비진리적인 맹신과 성령의 무지가 인간세상을 다시 지배하는 어리석음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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