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진리의 힘 본문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태초부터 정해져있는 이 세상을 이루는 이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은 이 이치를 통해서 생겨났고
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현상도 아무 것도 없다.
이 진리는 우주의 시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우주의 뜻이며 약속이니
예수님과 부처님도 완전한 인간이 되어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림으로써
그 진리를 발견한 것이지 그분들이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한치의 어김이 없어서 수학의 공식과 같다.
공식이라 함은 정해져 있으며 영원불변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이 좋아지고 나빠지는 일, 사업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일, 세상이 흥하고 망하는 일, 개인이 구원받고 지옥에 가는 일도 모두 그 이치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성자들은 이렇게 정해져있는 진리를 보시고 그 길만이 인간의 삶을 복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이를 밝혀 세상을 깨우치신 것이다.
세상의 일은 이처럼 정해져 있는 진리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리의 공식에 따라 행하지 않을 때는 결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처럼 정해져 있는 불변의 진리를 정법이라 하고 이를 가르치는 자를 성자라 하며
진리에 어긋난 가르침을 말법이라 하고 이를 전하는 자를 사탄 또는 악마라 하는 것이다.
성자들은 모두 말법이 가득한 세상에서 태어났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유대인들은 압박과 수탈에 시달리며 살았다. 유대민족은 당시 그들의 신인 여호와가 자기민족을 구원해준다고 확신하고 광신적으로 신을 믿고 있었지만 그들 종교에는 맹신만 있었지 세상과 인간을 복되게 하는 밝은 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진리가 없는 유대사회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양심이 없었고 사회에는 정의가 없었으며 불신과 죄악과 위선이 넘쳐났다. 그래서 유대사회는 어둡고 나약했으며 망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선적으로 신을 믿으며 성령에 젖어사는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고 꾸짖으며 “말로만 주를 외치지 말고 주의 뜻을 행하라!” 외치셨던 것이다. 진정한 구원과 지상천국은 하나님을 섬기고 성령을 받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도리와 진리를 열심히 실천해야 온다는 것을 보셨던 것이다. 그러자 진리에 의해 자신들의 거짓된 믿음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제사장과 유대교인들은 진리를 밝히는 예수를 여호와의 뜻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던 것이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에도 세상은 온갖 말법이 판을 치고 각 민족 간에는 약육강식의 전쟁이 벌어지는 아수라장 속에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인도사회에는 정신적 혼돈이 극심해 육사외도가 있었는데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과 자재천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존우론, 지수화풍과 같은 물질요소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유물론, 진리라는 것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론 등 다양한 말법들이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러 삼세를 보는 법안을 얻으시고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진리를 밝혀 기존에 있던 모든 말법의 혼돈을 명확히 정리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인과법과 유법(실상법, 사실법)이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실이며 원인에 의해 나타나니 깨달은 자는 인과법을 보게 되고 인과법을 보게되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보게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게 보고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행하는 팔정도로 좋은 원인을 지으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이고득락 [離苦得樂]의 결과를 얻으며 마침내 해탈에 이른다는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이처럼 모든 성자들이 전하고자 하신 말씀의 핵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만약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진리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4대성자를 존경할 이유가 없으며 성자들이 존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가 분명히 존재하며 진리의 요체를 밝혔기에 우리는 4대 성인을 인류의 스승이라 존경하는 것이며 진리가 생생히 흐르고 있는 이 세상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이 세상을 지키는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생기며 지은대로 받는다는 법칙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모든 성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인과법을 밝힌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고 불경 자체가 인과법을 설한 것이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떠한가?
구약은 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니 진리와 무관한 것이니 제외하고 예수님의 언행을 기록한 신약성경은 오늘날 많이 훼손되었지만 성자만이 볼 수있는 진리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6장 43절-45절을 보면,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여기서도 마치 부처님의 인과법을 보는 듯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시며 마음 속에 있는 업이말과 행동으로 나타남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누가 8장 5절-8절을 보면,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좋은 인연을 지어야 좋은 결과가 온다는 인과의 이치를 잘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이외에도 성경에는 많이 없어졌지만 인과법을 설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4대성인 중 한 분인 소크라테스도 『파이돈』에서 "죽은 자는 산 자로부터 나오고 산 자는 죽은 자로부터 나오며 선한 영혼은 악한 영혼보다 더 좋은 운명을 가진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전생의 습관에 따라 다시금 메이게 되는데 마구 폭식하거나 제멋대로 산다거나 술에 취해 산 자는 당나귀나 그밖에 탐욕스런 동물로 태어나고 부정한 일과 포악한 일, 도적질을 한 사람은 독수리나 매 같은 것으로 태어나며 부지런하고 규칙을 즐기는 이는 개미나 벌이 되며 또 그들로부터 다시 인간이 나올 수 있다." 라고 하여 사후의 인과가 이루어지는 생명의 실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과법은 한치의 어김없이 세상을 지키며 이루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과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며 인과법에 어긋난 일은 이치에 어긋난 일로서 결코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농부가 풍년을 이루기 위해서는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쳐주는 원인을 지어야만 하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인 진리를 행해야 하고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바르게 보고 깨치고 행하여 팔정도로 몸과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기고 씨만 뿌려놓고 기도만으로 풍년을 바라거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위선적으로 여호와만 부른다거나
진리를 배우거나 실천하지 않고 오직 마음으로만 모든 것이 공이라고 지워버림으로써 해탈을 얻으려고 한다면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 속에 정해져 있는 법칙을 진리라 하고
그 진리에 의해 나타나 있는 사실적인 일들을 진실이라 하며
그 이치에 반하는 것을 비진리라고 하고
이치와 사실 속에 나타날 수 없는 일들을 거짓 또는 환상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일부로 태어나 우주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서
우주의 뜻과 원리인 진리에 따라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그는 우주와 하나되어 우주가 바라는 존재로서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 수 있을 것이며
이 우주 속에 존재하지 않는 헛된 것을 바라거나 우주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간다면
그는 결국 우주와 부조화되어 세상과 부딪히고 고통과 무의미속에 헛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진리보다는 비진리가, 진실보다는 거짓이 더 득세하고 있다. 진리는 상대화되어 더 이상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길을 잃은 현대인들은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오직 욕망과 쾌락만을 쫒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 철학사조는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진리가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 유일한 진리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대적이라는 주장은 진리를 농락한 옛 소피스트(궤변론자)들의 말과 같은 것으로 이 시대가 진리가 사라진 말세임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으며 그만큼 세상이 어둡고 혼돈스럽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수천년 전에 성자들이 생명을 바쳐 세상에 전한 불변의 진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세상은 왜 이렇게 진리를 잃고 헤매고 있을까?
그 이유는 오늘날 진리를 전해야 하는 종교가 진리를 전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거짓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성자들이 밝힌 진리를 왜곡한 거대한 어둠의 세력인 사탄의 음모가 숨어있는 것이다.
성자들이 처음 나타나셨을 때부터 진리를 왜곡하려는 어둠의 세력들의 반발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것은 진리의 공통된 운명이니 진리는 빛이요 거짓은 어둠이기 때문이다. 빛이 커지면 어둠이 죽어버리기 때문에 거짓과 어둠의 세력은 진리가 커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진리가 나타나면 그로인해 피해를 받는 거짓과 어둠의 세력들은 진리를 쳐내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어둠의 세력이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였으며 불교에서는 힌두교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끝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태운 결과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으시고 성자가 되시어 세상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진리를 밝히셨다. 그러나 당시 유대사회는 좋은 세상과 좋은 인간을 만드는 진리를 행하지 않고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면서 신이 모든 것을 다해주길 바라고 뒤로는 위선적인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의 맹신성과 위선을 꾸짖으며 진리를 밝히고 인간이 행해야 할 도리를 깨우치신 것이다. 아무리 신을 절대적으로 믿어도 진리를 행하지 않으면 유대사회의 재건도, 영혼의 구원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의 신들은 이러한 진리의 가르침를 원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진리를 깨치면 모든 것을 이치대로 하지 자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맹신적인 유대교인들을 시켜 예수를 죽이고 바울에게 성령으로 나타나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전하라 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이러한 안타까움이 들어있는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8장 31-38)
31.그러므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7.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자기 아비에게 들은 대로 맹신적으로 여호와만 섬기며 진리를 행하지 않고 인간의 양심과 도리를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여호와를 섬기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인 진리를 배우고 행하는 자야 말로 진정 내안에 머무는 자로서 자유와 구원을 얻는다”고 하시면서 “너희들은 무지하게 여호와만 맹신하니 맹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죽이려 한다”고 꾸짖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사탄의 세력의 탄압에 의해 예수님이 밝힌 진리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다시 신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만 남은 것이다.
불교도 처음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모든 것을 신이 좌우한다는 존우론과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론을 모두 척파하고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나타난다는 인과법과 사실을 중시하는 유법을 밝히신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인과법을 깨쳐 모든 문제를 바로 보고 그에 맞는 올바른 원인을 지으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고 좋은 세상과 해탈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인도사회를 지배하던 힌두교에서는 이 세상은 본래 환상에 의해 나타난 공한 것으로 삶을 허망하고 덧없는 것으로 보아 모든 집착을 버리고 명상에 들어 신과 하나되는 범아일여의 경지에 도달하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부처님이 밝히신 사실적인 이치를 부정하고 부처님이 깨우친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마저 공한 것이라 주장하여 모든 것은 환이며 분별에 불과하니 진리도 깨달을 것도 없으며 부처도 중생도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힌두교의 감염은 힌두관념에 물든 대중부의 승려들을 통해 초기 정법 500년동안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들은 힌두교의 마야(환)사상의 영향을 받아 일체법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무위론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하여 대승불교가 일어나 용수가 중관론을 제창하면서 초기불교의 모든 유법과 인과법을 부정하고 공사상을 불교의 핵심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사실성을 잃고 관념화됨으로써 불교인들은 염세적이고 무기력하게 되었으며 불교를 믿는 나라는 진리와 활력을 잃고 나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 종교들은 성자들의 가르침인 진리를 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해치는 말법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종교들은 모든 것을 인간의 행복과 사실적 인과관계로 분석하는 인본주의와 이성주의에 기초한 현대 문명과 맞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종교에서 말하는 관념적인 이야기들은 학교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초등학생들이 들어도 웃어넘기는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천여년간에 걸친 이러한 종교의 어둠을 깨고 다시 이성을 개발하고 자연법칙인 과학을 발전시켜 현대문명을 발달시켜 왔다. 모든 일은 신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인간의 이성과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노력이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한계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인류는 인간이 왜 사는지, 인간의 행복은 무엇인지,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 구원과 완성은 어떻게 오는지에 대한 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진리의 종교라면 여기에 대해 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는 성자들이 밝힌 궁극적인 진리는 모두 잊어버리고 왜곡된 관념과 미신적인 이야기만 하니 현대인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이성은 모두 깨어있는데 기독교는 맹신적으로 신만 믿고 미심쩍은 심령현상인 성령을 영접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불교는 모든 것이 공하니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선정에 들어 공함을 깨쳐야 해탈에 이른다고 하니 현실 속에서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종교에서 전하고 있는 비진리적인 현상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기독교에서는 예수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삼일만에 환생하셨고 이를 믿는 자 천국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그 속에 이치가 들어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심신에 변화가 오면 구원을 받는다고 해야지 아무 일을 안해도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이 온다는 것은 도그마일 뿐이지 진리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사실적인 법칙으로 누구나 현실 속에서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인류역사 이래 죽어 몸이 부패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사례가 없는데 어찌 십자가에 못박히고 창에 찔려 영혼이 육신을 떠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할 수 있으며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죄가 많은 사람을 자기를 믿는다는 이유로 구원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이루어지는 이치에 따라 올바른 원인을 지어야 그에 부합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부처나 예수를 믿고 기도나 성령으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진리가 아닌 것이다. 만약 기도를 해서 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농부가 씨만 뿌려놓고 기도만 열심히 하면 풍년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 또한 거짓이며 비진리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공이고 착각이니 현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모든 분별을 버리고 선정에 들어 공을 깨치라 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은 생생한 현실 속에서 급박하게 돌아간다. 이러한 중요한 현실을 경시하여 실재하지 않는 환이라 하여 관념화시키고 사실적인 인과관계를 모두 허망한 것이라 하여 집착과 분별을 버리라고 하니 어찌 현실을 바로보고 이끄는 진리의 종교라 할 것인가?
따라서 이러한 주장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거짓이며 환상이다.
진리는 너무나 밝고 명확하며 사실로 증명되기 때문에 말법의 환상과 비진리가 번지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불행한 결과가 다가온다.
우리는 이러한 엄정한 진리의 심판을 역사 속에서 명확히 볼 수 있다.
무조건적인 믿음과 성령을 강조하는 유대교는 유대민족을 파멸로 몰아넣었으며 비진리적이고 맹신적인 기독교가 그리스 로마문화의 진리성과 이성성을 파괴하고 유럽문화의 중심이 되자 찬란했던 고대 서구문명은 천여년간의 암흑기에 잠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공하다고 진리도 버리고 분별도 버리고 노력도 버린 불교는 동양사회를 관념화시켜 옳고 그름이 사라진 법도 이치도 없는 어둡고 무지한 나라를 만들어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앞세운 서구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는 과보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초기의 성자들은 오늘날의 종교와 다른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성자들은 이 우주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모든 진리를 보신 분으로 사실 속에서 확인 가능하고 모든 사람이 이해되는 가르침을 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둠의 사도들이 중간에서 그것을 왜곡함으로써 오히려 종교가 세상을 망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예수님은 무조건적으로 신만 믿고 세상이 이루어지는 진리를 행하지 않는 유대민족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고 꾸짖으며 “말로만 주를 외치지 말고 주의 뜻을 행하라!” 외치셨다. 즉 구원과 지상천국은 하나님을 섬기고 성령을 받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지어놓은 진리에 따라 거짓과 악을 범하지 말고 인간의 도리를 열심히 행하여 좋은 마음과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온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바리새파의 율법가였던 사도 바울이 이러한 예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빼버리고 유대교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기독교를 왜곡해 버린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러 삼세를 보는 정득각을 얻으시고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실상과 진리를 밝혀 주셨다. 그 가르침을 사실을 중시한다고 하여 유법이라 했고 모든 것이 인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여 인과법이라 하셨다. 즉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인과법을 깨달아 문제를 정확히 분석하여 올바른 원인을 지으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게 보고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행하는 팔정도로 좋은 원인을 지으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이고득락 [離苦得樂]의 결과를 얻으며 마침내 해탈에 이른다는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그런데 힌두교의 논사였던 용수가 나타나 부처님의 깨달음의 근본이 공이라 하여 모든 유법과 인과법을 부정하고 공법을 주장함으로써 불교는 사실적이과 과학적인 인과법을 잃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관념에 빠져 무기력하고 비현실적인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종교가 현대문명을 인도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현대인들을 비진리로 오도하는 어둠과 미신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과 인과관계를 중시하는 과학이론들은 오늘날 현대문명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인간들은 과거 신본주의 종교나 관념적 종교가 강요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신의 은총에 의지하는 미신적인 구원론에서 벗어나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검증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인간의 이성을 활용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물질문명을 이룬 것이다. 처음 과학이 나타났을 때에도 많은 박해가 있었지만 그 이치가 너무나 명약관화하고 현실에서 증명됨으로써 종교적 환상과 미신적인 관념들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이성과 진리에 의지하여 사실에 입각한 이치를 밝히고 증명된 것만 믿는 과학정신은 성자들이 이 세상의 진실을 보고 그 이치를 밝힌 진리의 가르침과 같은 일맥상통한 것이다. 다만 과학은 물질적 인과관계로만 모든 것을 해석하는 방면에 성자들은 물질과 생명, 정신과 육체, 이승과 저승을 한꺼번에 보는 완전한 시각을 가지고 하나의 이치로 설명하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바른 이치로 사람들의 마음을 깨어나게 하고 세상을 밝게 했으나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현상만 인정하는 속성 때문에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인간을 무의미와 소외에 빠뜨리는 한계를 보이게 되었다. 이 세상은 물질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보다 더 중요한 생명과 정신에 의해 이끌리고 있기 때문에 물질로만 세상을 해석하게 되면 세상을 바로 볼 수 없게 되고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과학은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인간에게서 정신과 가치문제를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동물화·물질화시키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물질과 정신, 생과 사, 이승과 저승의 모든 실상과 완전한 진리를 밝힌 성자들의 초기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소외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문명의 한계에서 벗어나 생명과 물질, 생과 사, 이승과 저승, 종교와 과학을 하나로 아우르는 진리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며 이 세상이 창조주의 완전한 뜻과 인간완성이라는 가치가 존재하는 신성한 의미체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뜻과 길을 보는 자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지만
세상 속에서 물질과 무의미만 보는 자는 돌멩이처럼 던져진 존재가 되어 단백질 덩어리로 무의미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현대문명의 한계를 벗어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든 진리를 보신 성자들의 가르침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진리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veritas vos liberabit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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