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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근원

왜 금강경이 위경인가?

gincil 2013. 10. 30. 22:19

왜 금강경이 위경인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칠~팔백년이 지나자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면서 여기 저기서 부처님의 말씀을 차용한 정체불명의 대승경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대승경전들은 부처님의 유법을 계승해오던 상좌부의 사실적인 가르침에 배치되는 것으로 여러번 이단으로  단죄를 받은 바가 있는 대중부의 이설을 근거로 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당시 유행하던 공관을 주된 내용과 논리로 작가도 분명하지 않게 나타난 대승경전을 보고 당시 인도불교의 제도권이었던 정통 상좌부에서는 이러한 경전들은 이야기책에 불과하며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을 파괴하기 위한 말법이라고 엄금한 바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대승경전들이 부처님의 숨겨진 비전인 정법이라면 수백년 전통을 가진 기존 상좌부에서 몰랐을 리가 없으며 소설에 불과하다고 배척했을 리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승경전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러한 경전을 쓴 당시 학승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불제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리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부처님 사후 칠~팔백년이 지나  부처님과 관계없이 바로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경으로 쓰면서 마치 직접 들은 것처럼 여시아문 [如是我聞] 형식을 빌어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도 대승경전은 진리로서의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전혀 쓰지 않고 자신들의 논리만 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극히 일부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여시아문 형식도 그러하며 여래의 실체를 설명한 부분도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인용한 여래의 실체에 관한 내용은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부처님에 관한 사실인 것입니다.


“여래는 참말을 하는 사람이오 실지로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오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오 속이는 말을 아니하는 사람이며 또 다른 변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니라”


그래서 여래는 관념적인 말을 하지 않으며 자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이치 그대로 설명하시는 것이며 그 속에는 사실과 다른 한점의 거짓이나 환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이러한 진실을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전이 진실인 듯이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전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경을 쓴 사람이 진리를 분명히 볼 수 있는 깨달은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당시에 깨달은 자가 나왔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공을 주장하는 대중부의 비주류적인 학설이 주류적인 상좌부의 유법에 도전하고 있었고 정통성있는 상좌부에서 인정하지 않는 저자불명의 대승경전이 여기 저기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당시 나온 대승경전들은 깨달은 자가 쓴 것이 아니라 대중부의 학승들이 당시 유행하던 공이라는 관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썼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진리가 증명되지 않는 깨달은 자가 쓰지도 않은 경전을 진리인양 따르는 것은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특징은 논리적 모순에 있습니다.

아는 체 하는 자들은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통해 언설을 떠난 공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 탁월한 인식론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 진실은 깨닫지 못한 자들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공이라는 관념을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로 함부로 전개한 것일 뿐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봅시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아라한(阿羅漢)이 능히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 도(道)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한 연고인가 하오면 실로 법이 없음이 아라한이라 하나이다. 만일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하면 곧 아·인·중생·수자상에 집착된 것이옵니다.” 


“이 복덕은 곧 복덕성(福德性)이 아닐새 이런 고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설하셨나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며 이름이 불법이다.”


이러한 명제들은 깨닫지 못한 자가 공이라는 관념을 주장하기 위해 자기 생각으로 모순논리를 만들어 모든 실체와 이치를 부정하고자 만든 말입니다.


얻은 것은 얻은 것이고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인데 

얻은 것도 없고 얻었다는 사실도 집착이라고 하여 실체를 부정하니 

이 글에 빠지게 되면 인간의 정신을 망쳐 옳고 그름을 가리는 분별과 지혜를 잃게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 법의 핵심인 인과법을 깨칠 수 없으며 세상을 볼 수 없으며 올바른 공덕을 지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은 깨달은 자가 깨달은 경지를 직접 쓴 글이 아니라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에 불과한 학승들이 공이라는 관념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모순논리로 전개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실체도 잡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속에 무슨 깊은 이치가 있는가 하고 빠져들면 평생 그 함정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환상 속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상과 형이상학적인 모순논리를 받아들인 나라는 불교가 성하게 되는데 실체와 이치가 없으니 그만큼 허황된 삶을 살게 되어 국민들의 삶은 피폐하고 나라는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사실적이고 진실한 실상의 이치보다는 화려하고 기적적인 환상을 좋아합니다. 동대문이 땅에 붙어 있다면 시시해서 믿으려 하지 않지만 하늘에 둥둥떠서 음악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 퍼진다고 펑을 치면 사람들이 좋아라! 하고 들으러 몰려드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없고 거짓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자기 돈을 바쳐가면서까지 북새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은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화려한 환상에 빠진 자는 결국 자신과 세상을 망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마음이 망할수록 세상이 어두울수록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상인은 도를 들으면 기뻐하고 중인은 반신반의하고 하인은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승경전이 나타남으로써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세상을 이치대로 파악하는 과학적이고 진리적인 부처님의 실상법과 인과법은 사라지고 세상이 공하다는 관념에 빠진 무기력과 염세적인 불교가 동양사회를 지배하게 되어 사회는 어둡고 발전이 정체되어 결국 서구 제국주의의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님의 말처럼 무주상보시를 하면, 즉 요즘 광고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시하면 누가 좋아질까요?


요즘 종교인들이 큰 차를 몰고 종교단체들이 큰 건물짓는 원인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이러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치에 맞지 않는 관념적인 말을 만들어 신도들은 무조건 보시만 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게 한 후 중생들의 시주와 헌금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석가여래부처님의 말처럼 무주상보시를 실천하지 못함이 죄스러울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죄스러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있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을 관념으로 상정해 놓고 실천하려 하니 실천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석가여래 부처님께서 보시를 하실 때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셨다고 생각하셨는지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일체지자로 삼계의 모든 법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일을 할 때는 그 일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알고 중생과 세상을 축복해주는 좋은 원인을 짓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공덕이 되는 일과 공덕이 되지 않고 어리석음을 더하는 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좋은 결실을 얻는다는 가르침은 좋은 원인을 짓는 것이며 좋은 공덕입니다.

거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남과 자신에게 죄를 짓지 않고 맑은 마음과 신뢰있는 세상을 만들기에 좋은 가르침이며 좋은 공덕이 됩니다.

사실에 맞게 올바른 원인을 지어야 한다는 것은 좋은 가르침이며 좋은 공덕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축복하는 좋은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아보지 않고 환상과 잘못된 관념에 빠져 신이나 악인에게 보시하면 복을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함부로 자신의 재산을 퍼주면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으로 공덕이 되지 않으며 어리석은 자기를 만들어 자신을 망치게 됩니다.


그래서 무지로 인해 잘 알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면 공덕이 아니라 죄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양무제가 절을 많이 짓고 스님들을 많이 봉양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는가 하고 달마대사에게 물었을 때 아무 공덕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리 물질로 세상에 봉사해도 참된 진리를 세상에 전하지 못해 세상과 인간을 밝히지 못했으니 공덕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님은 주는 마음은 받으려는 마음과 같이 일어나니 이것을 염려하여 석가여래께서 무주상보시를 강조했다고 하면서 받으려는 마음이 곧 번뇌의 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사실 속에 없는 관념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면 돌아오는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인간의 정신이 정상이라면 저절로 그런 이치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상적 사고를 번뇌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을 사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문제를 이해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과 해탈의 본질을 공으로 보는 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선업도 업이고 악업도 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업을 지우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남을 위해 베푸는 공덕도 베품없이 지어 선업마저 쌓이지 않아야 선한 윤회의 고리에서도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사실이 아니며 관념으로 만든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은 모든 업을 버려야 해탈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악업을 버리고 선업을 지어야 해탈에 이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업은 업이 아니라 업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업은 인간이 지니고 나온 불성을 흐리는 흔적이라 한다면

선업은 불성을 맑게 하는 반대되는 흔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업을 지으면 업이 두터워지지만 선업을 지으면 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악업이지만 정직하게 사는 것은 선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살면 마음이 맑아지고 어둠이 없어서 

모든 일을 당당하고 밝고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아함경 원인경에 잘 나타나 있는데, 어떤 업은 다른 업을 일어나게 하고 어떤 업은 다른 업을 소멸하게 한다는 이치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있습니다.

“탐욕 없음과 성냄 없음과 어리석음이 없게 되면 그로부터 일어난 업은 유익한 것이고, 그 업은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며, 그 업은 다른 업을 소멸하게 하고, 그 업은 다른 업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실상 속에 있는 이치를 모르니 관념에 빠진 자들은 인간의 올바른 이성과 선업마저 버리라고 인간을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상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인 칠불통계에서도 “모든 악을 짓지 말고 (諸惡莫作) 모든 선을 힘써 행하여 (衆善奉行)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是諸佛敎)” 라고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답변 감사드립니다

>

>허해구선생님께서는 금강경이 위경으로 입증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

>금강경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석가여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는지 그 근거를 들어주십시오

>

>그리고 금강경이 석가여래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것으로 생각하신다면서 왜 금강경 제14분에 나오는 

>

>부처님말씀을 책(p181)에 인용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

>허해구선생님께서 책에 인용하신 금강경의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狂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참말을 하는 사람이오 실지로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오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오 속이는 말을 아니하는 사람이며 또 다른 

>변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니라

>

>위 글귀를 인용하신 이유가 금강경에 나오는 어느 부분은 석가여래부처님의 말씀이고

>

>또 어느 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뜻인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어느분의 기준인지요

>

>아니면 그냥 단순히 금강경에 나온 이 글귀가 좋아서 인용하셨는지요

>

>좋아서 인용하셨다면 이 글귀는 누구의 말씀으로 알고 인용하셨는지요

>

>허해구 선생님의 말씀대로 무주상보시는 바라지말고 보시를 행하라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

>우리네 중생들이야 보시를 할때 당연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할것입니다만

>

>석가여래 부처님께서도 보시를 하실때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석가여래부처님께서는 보시한다는 생각도 없이 보시를 하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

>그렇다면 우리네 중생들도 덕을 쌓고 마음을 닦고 쌓고 닦고 쌓고 닦고 하다보면 어느 생에서는

>

>허해구 선생님께서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무주상보시가 가능하지 않을런지요

>

>주는 마음은 받으려는 마음과 같이 일어나니 이것을 염려하여 석가여래께서 무주상보시를 강조하신건 아닐런지요

>

>받으려는 마음이 곧 번뇌의 원인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

>이글을 적으면서 석가여래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함이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

>허해구 선생님의 뜻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단지 진실을 추구하려는 마음 하나 뿐이니

>

>글에서 따지려고 하는 저의 모습이 보이더라도 아직 이정도 밖에 할 수 없는 중생이라 그러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시 바랍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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