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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십시요. 본문

실상학회 질문답변

인성교육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십시요.

gincil 2014. 1. 8. 00:52

"인성 교육이란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인성교육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십시요.”


인성교육이라는 것은 인간교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인성이라는 것은 인간 교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성품이나 성질이나 인성 교육은 인간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깨 인성은 바로 성질 성품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할까요. 그거는 사람들이 있는 일을 바로 이해하게 될 때 사람은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끝없이 반복했습니다. 제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하나의 계율이나 이런 데 얽매여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이런 계율을 어기는 일이, 나는 누구에게 계율을 배우지도 않았고 계율을 강요당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계율을 어기고 산다는 일이 너무 힘들어졌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알고 모르는 것에 의해서 엄청난 하나의 성격이나 행동이나 생각이나 판단이나 이런 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제 자신 속에 문제가 많았을 때에는 남이 내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던가 내 말에 투박을 줄 때는 증오심이 끓고 분노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나서 누가 내에게 잘못을 지적하면 두려움을 느낄 뿐이지 아! 내가 잘못한데에 대해서 부끄럽고 두려움을 느낄 뿐이지 증오심이나 분노 같은 것이 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어떤 일을 알 때와 모를 때의 차이입니다.


옛날 이 문제를 두고 간단하게 하나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부처에게 가서, “알고 죄를 짓는 것이 큰 죄입니까, 모르고 죄를 짓는 것이 큰 죄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알고 죄를 짓는 죄가 큰 죄입니까, 모르고 죄를 짓는 게 큰 죄입니까?


우리 인간 사회의 법률에 보면 알고 죄를 짓는 것을 고의이고 모르고 죄를 짓는 건 과실입니다. 그렇지요? 이 형량에 차이가 납니다이. 고의와 과실은 형량에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부처는 여기에 다른 대답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


이 자연법 상에서는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큽니다. 자연법 상에서는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큽니다. 알고 죄를 짓는 자는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도 느낄 수 있고 또 그리고 이 죄책감을 느낌으로 해서 다시 그 죄를 무서워하게 되지만은 모르고 죄를 짓는 자는  그 죄책감을 느낄 수가 없으니까 앞으로도 이 죄를 자신이 고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무섭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자, 인성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있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인성입니다. “인성교육은 사람으로써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치는 것을 말해서 인성교육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럼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가?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게 됩니다. 어저께 영국의 문법책을 보고 명재가 내한테 물었습니다.

“양심이 무엇입니까?”


“양심은 옳고 그름을 행하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않하는 것이다.” 이러니깨 아! 영국 책에는, 사전에는 양심을 옳고 그름을, 옳고 그릇된 일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써 놓았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옳고 그름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양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양심을 얻기 위해서는 옳고 그른 일을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아무리 알아도 행동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어떻게 행동하지 않는 자의 양심을 양심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옳고 그른 일을 알고 행동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양심을, 자기의 양심을 평가받을 수 있다. 옳고 그른 일을 알고 행동할 때 자신의 양심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가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은 자기 양심을 보여 줄 수가 없지요? 행동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행동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양심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깨 어떤 상황에서도 무지는 양심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어떤 큰 사람이, 등치가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의 귀퉁박이를 때리고 있다고 해서 꼭 그 큰 사람이 잘못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 사람이 작은 사람을 꾸짓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작은 사람이 잘못 때문에 꾸짓을 듣는다면은 그것은 작은 사람을 편드는 것이 아니고  등치 큰 사람의 편을 들어야 된다. 그러나 저도 어린 시절에는 약한 사람을 도우는 일이 정의인 줄 알았어요. 정의는 옳은 일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 바로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힘이 없는 약한 사람이 정의는 될 수 없습니다.  도적질이 정당활 될 수 없고, 강도가 정당화 될 수 없고  뭐 사기가 정당화 될 수 없다면 힘이 없는 자도 도둑질도, 신체가 외소한 사람도 도둑질은 할 수 있고 사기는 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힘이 약한 자가 꼭 정의의 편에, 약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은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옳은 자의 편에 서는 것이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이해를 달리 해야 합니다.


이유 없이 하나의 강한 자로부터 횡포를 받게 될 때 우리는 그 횡포에 맞서서 약한 자의 편에 것 그것은 정의입니다. 정의라고 봐도 됩니다. 그러니깨 우리는 항상 성급하게 우리가 정의의 편에 서기 위해서도 항상 있는 일을 주시하고 있는 일을 확인한 이후에 자기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고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9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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