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초기불교의 십바라밀 본문
대승불교는 상좌불교의 귀족성과 해탈 위주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하며 초기불교의 근본정신인 보살정신을 강조하고 공덕행의 실천불교를 주장했다. 그래서 거대한 장원 속에 들어앉아 권위를 부리는 상좌 중심의 기존 승단을 소승이라 칭하면서 자신들은 자기완성뿐만 아니라 중생의 구원까지도 책임진다고 하여 대승이라 칭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부처님의 기본정신이 보살정신이며 공덕행이라고 주장한 것일까?
사실 초기불교의 경전을 보면 공덕행과 관련된 내용이 드문드문 있지 일반적인 주요 덕목으로 찾기 힘들다. 그 이유는 부파불교의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이론전개와 고와 무아사상에 기반을 둔 염세주의에 근거해, 선정에 관한 내용들이 강조되면서 실천행인 공덕에 관한 내용이 많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불교 속에는 중생을 사랑하고 공덕을 지어야 한다는 기본정신이 맥맥이 흐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전생에 보살로서 수많은 공덕행을 지어 그 공덕이 세상을 덮을 정도가 되었기에 이 땅에 오셔서 부처가 되었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이해하고 있었고, 살아계실 때 팔십 평생을 무지하고 완고한 중생을 위해 자신을 바치다 길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서도 세상에 대한 자비와 사랑, 공덕행의 중요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론자들이 부처님의 근본정신인 보살행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공덕행과 보살행의 가르침을 회복하고 그 가치를 확립하는 것이 불교의 생명력을 회복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공덕행과 관련한 주요 가르침 중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초기불교의 십바라밀이다. 우리는 대승불교의 환경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동남아에서 전승되고 있는 초기불교의 이론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다. 그러나 동남아 불교에는 팔정도와 함께 십바라밀이 전해지고 있다.
흔히 바라밀이라 하면 대승불교의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혜, 선정)이 연상되나 상좌불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동남아 불교 속에는 불교인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녀야 할 열가지 중요한 덕목인 십바라밀이 전승되고 있다. (바라밀의 원어인 파라미(parami)는 ‘중생을 피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바라밀(波羅蜜)로 음역됨). 그 이후 대승불교에서도 십바라밀을 만든 것이 있는데 이것은 대승의 육바라밀에 방편(方便)·서원(願)·힘(力)·지혜(智)를 더한 것이니 참고로 알고 있으면 되겠다.
초기불교의 십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혜, 자유(벗어남), 진실, 서원(결의), 사랑(자애), 평온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십바라밀과 대승의 육바라밀의 겹치는 항목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혜 다섯 가지인데 대승불교에서 중시되고 있는 선정바라밀은 십바라밀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계정혜와 팔정도, 육바라밀 속에 선정이 들어있어, 선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선정과 명상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해탈에 이르는 주요 덕목인 십바라밀 속에 선정이 빠져있다는 것은 초기 불교에서 선정이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오늘과 같이 가만히 앉아 선정으로 무를 깨쳐 해탈을 얻는다는 논리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보다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혜, 자유(벗어남), 진실, 서원(결의), 사랑(자애), 평온과 같이 인간의 좋은 품성을 길러 노력하고 공덕행을 함으로써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항은 팔정도나 대승의 육바라밀에는 없는 것으로, 초기 십바라밀에만 있는 항목이 있는데 그것은 진실, 사랑(축복, 자애, 공덕), 자유(벗어남, 해탈), 서원(결의), 평안(열반)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진실과 사랑과 서원(결의)은 이곳 진실의 근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장 중시하는 덕목이다. 진실해야만 거짓없는 맑은 마음에 세상이 바로 비치며 사랑과 강한 의지(용기)가 있어야만 어둠에 꺾이지 않고 진리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 자신의 업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요한 불교의 핵심 가치가 그동안 세상에 널리 전해지지 않았으니 좋은 인간과 밝은 세상이 나타나기 어려웠고 진리의 종교인 불교의 생명력이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깨달음이란 진실해짐으로써 거짓없는 밝은 마음에 세상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이다. 따라서 정법을 배워 밝아지니 무지에서 벗어나 지혜로워지는 것이며, 자신이 배운 밝고 좋은 것이 세상에 널리 이로운 것을 알고 이를 끝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세상에 널리 전하다보니 그 열정과 안타까움으로 자신이 지닌 모든 삿됨과 어둠을 불살라 완전한 마음의 열매인 해탈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초기 불교가 소승이라고 폄하를 받는 것은 사랑과 진실과 용기와 같은 불교의 진수가 초기 수백 년간 구전으로 전해지고 학자들이 편집하는 과정에서 희미해졌기 때문이지,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본래부터 염세적이거나 자기 지향적인 선정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러한 증거를 초기 불교의 십바라밀 속에 있는 덕목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상구보리 하와중생’이라는 구호가 본래 초기불교에서 나온 가르침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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