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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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근원

공부할수록 커지는 의문

gincil 2017. 4. 25. 21:12

사람들은 이 세상의 무의미와 조물주의 불완전한 창조를 원망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완전한 뜻과 질서가 자리하고 있는 법계가 아니라 하며

인간에게 신성한 의미나 인간 완성의 경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조물주가 존재하고 그가 진정 자비롭고 완전하다면

처음부터 인간세상을 이런 저주스런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할텐데

지금 세상이 되어가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은

창조주가 본래 존재하지 않거나, 이 세상에 본래부터 진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완전합니다.

성자들은 이 세상에 흐르는 진리를 눈앞에 흐르는 시냇물처럼 너무나 명확하게 보았습니다.

다만 중생들의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의 뜻이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자신의 시각만큼 볼 수 있고, 자신의 능력만큼 행할 수 있도록

완전한 법계의 뜻과 질서를 짜놓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대는 세상이 안 보인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먼저 깨워야 합니다.

이것은 현대문명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현대문명은 세상은 무의미하며 길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주류철학인 실존철학은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무이며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철학은 더 이상 이 세상 속에서 진리나 본질적인 의미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되며

살아 숨쉬는 현재의 실존적인 삶을 중시하고 그 속에서 삶의 보람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진리의 존재와 삶의 의미와 가치는 중생들이 보지 못한 것이지, 성자들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중생들은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진실이라고 해서는 안 되며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자와 같이 자신의 눈을 밝혀

삶의 의미와 진리를 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진리의 인연을 만나는 것입니다.

깜깜한 말세에 눈 먼 장님들이 무엇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중생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을 눈뜬장님이라 한 것입니다.

 

길을 보지 못하고 현대문명의 무의미와 무질서에 빠져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이 실상에 근거하지 않은,

중생들이 지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그동안 역사 속에서 눈뜬 장님인 중생들이 지은 거짓과 관념에 빠져 환상 속을 헤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장님은 아무리 혼자서 어둠 속을 더듬어 보았자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것이 중생의 한계이며 운명입니다.

따라서 장님이 어둠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눈을 뜬 자를 만나야 합니다.

 

부처님 이후 수많은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겠다고 진리의 길을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야에서 한을 안고 스러져간 것은

정법의 인연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들은 깨달음의 빛을 옆에서 보았기에

그 길을 그대로 따라 하니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고

다음 생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수기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보는 자를 따르면 진리를 보게 되며,

안개 속에서 세상을 보는 자를 따르면 같이 안개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인과의 이치상 너무나 당연하고 명확한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정법의 인연은 세상을 바로 보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핵심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의 인연을 만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불경에서도 말세의 중생이 진리를 만나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바늘이 겨자씨에 꼽히거나

심해의 눈먼 거북이 대양에 떠도는 나무구멍으로 머리를 내미는 인연보다

희귀하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전생의 공덕이 있어

이곳에서 수천 년 만에 나타난 희귀한 깨달음의 인연을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1년을 열심히 배우고 깨치다 보면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멍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세상이 지어놓은 근거없는 지식과 논리 속에 살았는데

그러한 환상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지니 머리가 깨끗해져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업이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지기 때문이니

당황하지 말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온 대부분의 분들이 그런 과정을 겪었으니

그대에게도 그런 증험이 나타나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맑은 마음에 세상이 바로 비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또 일년이 지나면 그 맑은 마음에 세상 일이 이치대로 비치고 옳고 그름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일년이 지나면 사랑과 양심과 용기가 생겨 세상을 위하여 좋은 뜻을 전하게 됩니다.

자신의 근본이 좋아지고 진실해지니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일을 할 의지와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를 깨닫게 되면

실천이야 말고 가장 소중한 일이며 자신을 가꾸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삶을 통해 자신 속에 모든 일을 지을 수 있으며

자신이 지은 모든 일이 자신 속에 남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위한 가장 좋은 원인(공덕)을 짓는 일은

진리를 밝히고 전해 인간의 마음을 깨치는 일입니다.

진리를 밝히게 되면 거짓된 관념에 속아 살아오던

사람들의 삶이 진실해지고 어두운 세상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마음이 밝아진 사람들은 어둠과 불행에 빠지지 않고

바른 이치대로 세상에 좋은 원인을 지어 주위를 행복하게 만들게 됩니다.

 

사람을 하나 깨우치게 하면

그가 깨친 만큼 세상이 좋아지고 그 주위가 모두 밝아지니,

예로부터 금강석(다이아몬드)을 은하수만큼 보시하는 것보다

진리 한 구절을 전하는 공덕이 더 크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재물로 보시하거나 노동으로 돕지 않으셨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을 지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의식을 깨우치는 법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양심과 정의와 사랑을 아는 좋은 마음을 지닌 좋은 인간을 만들어 놓으면

그러한 세상은 모든 문제가 저절로 사라져 지상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위해 진리를 전하고 상대를 축복의 길로 안내하다 보면

하지만 거짓과 욕망이 들끓고 있는 현실 속에서

좋은 근본을 얻어 진리와 사랑과 용기로 세상을 축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이 따릅니다.

 

말법에 빠진 자들은 자신들의 밥줄이 끊어질까 봐 기를 쓰고 모함하고,

업을 지닌 자들은 그릇된 자신의 시각으로 진리를 모독하며 비웃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덕행은 그 사람의 무지를 이해하고 그를 가련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했기에,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마음에 불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의 불을 얻어 업을 태우는 원리입니다.

 

모든 것은 부딪힘을 통해 마찰이 생겨나고 열이 생깁니다.

자연에서 불을 얻기 위해서는 나무를 마찰시켜야 하듯이,

마음의 불이 일어나기 위해서도 세상과 부딪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 바로 현실의 중요성과 공덕행의 가치가 있으며,

세상과 진리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선한 마음의 고귀함이 있습니다.

 

이처럼 진리와 사랑으로 어두운 세상과 부딪히는 것이

업을 지우고 갈애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 최고의 길이며,

이것이 여태껏 나타난 수행법 중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깨달음의 길입니다.

 

과거 부처님도 전생의 공덕이 세상을 모두 덮을 정도였기 때문에

이생에 와서 해탈을 이루었다고 했으니

공덕행이야말로 모든 부처의 공통된 깨달음의 길이며 최고의 수행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업을 지우고 마음이 정화되면 맑은 의식 즉 진기로 가득한 정신을 얻게 됩니다.

중생들은 그 진기의 순도가 50~60%이나 영생과 열반에 이를수록 그 진기의 순도가 높아지며 성자들의 경우 업이 거의 사라지고 그 진기의 순도가 거의 100%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모든 업이 사라진 순수의식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반야지경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마음이 흐려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만,

앞으로 진리를 깨치고 그 의식이 정화될수록

그대는 분명히 세상의 뜻과 이치를 보게 될 것이며

살아 숨쉬는 법계의 실상과 만법귀일의 인과법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질문]---


안녕하세요.
깨달음에 목말라 찾아 헤매던 중 부처님 말씀이 진리라 생각되어
불교를 공부하고있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공부하던 중 "무아"에서 막혔었고,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비아를 주장하시는 분도 있고, 참나(아트만)를 주장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혼란이 가중되던 중 문득 이런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어의 한계에 얽매여 있는거 아닌가?"
"죽음에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정의한다 한들 우리는 죽음을 알고있는가?"
우리는 살아서도 죽음을 모르고 죽어서도 죽음을 모르는데 어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설령 죽음을 경험해 본 자가 죽음에대해 설명해준다 한들 내가 이해할까?
지금까지의 제 지식과 경험으로(알음알이)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이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열반" "해탈" "깨달음" "무아"도 경험해보지 않으면 제가 알 수 있을까요?
설명으로 고개를 끄덕여 이해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에 가까운 이해일까요?
그러면 공부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공부로는 도달되지 않는 길이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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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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