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대행스님과 주인공 본문

☆ 진실의 근원

대행스님과 주인공

gincil 2013. 4. 23. 22:15

<질문> 구도소년
한마음선원 대행스님의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꼭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주인공의 정체

나는 대행스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그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그곳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인공의 정체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녀의 주장중의 가장 중요한 요체가 바로 주인공에게 맡긴다는 말이다.
최근 법문에서 그녀는 이러한 대답을 하고 있다.
『"내 속에 칠보가 가득 차 있으니 잘났다는 생각, 못났다는 생각 다 버리고 자기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참 자기야말로 안되는 것도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돌 위에 세워 놓아도 삽니다. '주인공만이 모든 걸하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 관세음보살이 찰나에 드셔서 법을 설하기도 하고
약사보살이 찰나에 드셔서 또 법을 펼쳐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도와주십시요. 관세음 보살님 살려주십시요'할 것도 없습니다. 믿음 속에
제불보살과 역대 조사와 삼라만상의 온갖 조화가 다 깃들어 있습니다. 자기의
뿌리인 주인공을 굳게 믿으십시요. 뿌리만이 나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녀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현실적인 나와는 다른
근본 나가 있다고 주장하고 그 근본나에게 현재의 모든 판단과 행동을 맡기면 그
주인공이 모든 것을 대신 처리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선가에서 '본래 진면목인 나를 깨달아 반야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해탈을 얻게 된다'는 주장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주인공을 완전히 믿고 살면 깨닫지 않는 자도 주인공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준다는 식의 믿음체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아트만과 같은 존재인지, 하느님과 같은 존재인지 아니면 선가에서 말하는 본래 진면목인지?"
"주인공이 무언지 모르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스님께서는 '자기의 본래 모습인 주인공을 철저히 믿으라'고 가르치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기 주인공을 왜 믿어야 하는지요?"  그 이치를 알고 싶습니다. "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녀는 계속 애매한 말로 얼버무리면 주인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말로는 밝힐 수 없는 주인공의 정체에 대해 대답을 하라고 하니
그렇게 대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체가 분명하지 않는 것을 믿고 계속 맡기라고 주장하니
그제자들이 계속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실체가 없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찾게되는 것은 헛된 환상이나
그녀의 주위를 떠도는 주인공이라는 제3의 존재와의 만남인 것이다.
여기에 그녀의 깨달음의 정체가 있는 것이다.
그녀가 깨달음을 얻은 과거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녀는 세상을 위한 사랑을 행하는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비참한 유랑생활 속에서 어느순간에 영적 힘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녀의 깨달음은 반야의 체득이 아니라 제3의 존재의 영접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책속에는 어느 제자가 발표를 앞두고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 너무 당황했는데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리자
갑자기 말문이 트여 유창한 명강의를 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다른 의식이 작용했다는 좋은 증거인 것이다.

세상의 올바른 이치는 자기의 능력으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면
계속 생각이 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 것이다.

깨달음은 결코 남에게 의지하거나 남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자기의 마음속에 스스로 열매를 맺은 것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농부가 농사짓는 기술을 배워 자기것으로 하게 되면
그는 언제나 농기구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때를 가려 작물을 보살필 줄 아는 것이다.
깨달음도 바로 이와 같이 언제 어디서나 묘용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지
제3의 존재를 믿어 그 존재와 통할 때만 감응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말하는 주인공처럼 모든 것을 주인공에게 맡김으로서 묘용을 발휘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기운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제3의 기운은 자기마음이 내켜 제멋대로 온 존재이기 때문에 인연이
다하면 부른 자와 관계없이 자기 맘대로 떠나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인도의 경우에도 많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금세기 최고의 요기라고 하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이다.
그는 뱅갈어 이외에는 영어로 한번도 강의한 적이 없었는데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강의를 요청받고 말문이 막혀 한동안 그냥 있다가
답답한 마음에 영적 스승에게 기도를 드리자
갑자기 말문이 트여 유창한 영어로 달변의 강의를 하게 되었고
미국에서 성공적인 명상가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여러분이 성자로 믿는 인도의 명상가들은
이와같이 제3의 기운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여기서 말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윤회주체인 생명의 씨앗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나를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근본적인 나는 윤회의 주체인 생명의 씨앗으로서 끝없는 생의 수레바퀴를
돌면서 좋고 나쁜 업을 쌓아가면서 완성과 소멸의 고리를 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의 씨앗속에는 맑은 불성과 어두운 업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통하여 바른 진리를 깨닫고 선업을 쌓아야 하는 근본이유는
이러한 생명의 씨앗을 조금씩 정화시켜나가 업의 탁기를 제거하고 맑은 불성을
완성하여 생명의 열매를 맺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업과 바른 이치로 자신의 마음을 닦지 아니한 자가
아직 탁한 업이 가득 찬 자신의 생명의 근본인 주인공에 의지한다 한들
그는 현재와 같이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주인공에 의존한다는 말은
자기 생명의 근본인 영혼의 주체에 의지한다는 말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제3의 존재에게 의지하라는 영적인 유혹인 것이다.
매우 무서운 함정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은 어두운 세상이다.
진리의 길마저 왜곡되어 있다.
어떠한 것을 믿기 전에 깊은 의심과 분명한 증거가 필요한 것이다.
증명되기 전에는 차라리 행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곳이 진실을 깨닫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 진실의 근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  (0) 2013.04.23
백색형제단, 초인생활, UFO의 실제  (0) 2013.04.23
강하고 의미있는 인간이 될수 있는가?  (0) 2013.04.23
단군상  (0) 2013.04.23
현실의 범위  (0) 2013.04.23
Comments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진실의 근원 ginc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