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진리는 전하는 어려움 본문

☆ 진실의 근원

진리는 전하는 어려움

gincil 2016. 5. 6. 00:20

현대는 길을 잃은 세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왜 사는지 모른다.

인간의 의식은 항상 깨어있어서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왜 사는지, 이 세상이 무엇인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찾고 있다. 이것을 알아야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 미아처럼 내버려지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난파선에 실려 떠내려가면서 부딪치는 파도 속에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망망대해를 해매고 있는 그런 심정이고, 수천장 낭떠러지의 심연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면서 정신은 깨어서 앞으로 다가올 불행과 공포와 절망을 뼈저리게 직시하고 있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중생은 눈뜬 장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의 우상에 빠져 악과 어둠에 헤매는 자들에게 회개하라고 했고

소크라테스 안다고 하는 자들에게 너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처님은 인간이 바로 눈앞의 일도 볼 줄 모르는 눈뜬장님이라고 하시면서 모든 악의 근원은 무지라고 하셨다.

 

이러한 인간 사고의 한계에 대해서 근대에 들어서 서양 철학자들이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결론을 내었다. 그들은 종교개혁이후 신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과거와 달리 인간의 이성이 신을 대신해서 스스로 진리를 파악하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근본 화두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합리론이라고 해서 데카르트 같은 사람이, 인간에게는 신에게서 부여 받은 이성이 있어서 이 이성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사유만 하면 진리를 인식할 수 있고, 그러면 신이나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진리를 발견해서 올바르게 살 수 있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대륙과 달리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나 사실을 중시하는 흐름이 있었기에, 인간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주장한 대륙의 합리론과 달리 “인간의 사유로서는 진리를 알 수 없다” 고 하는 반론을 제시하게 되었다. 합리론에서 인간이 본래 태어나면서 신의 속성을 이어받은 이성이 있어서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경험론에서는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진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야 되는데, 바보나 어린이들은 전혀 진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을 봐서, 진리라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신성을 통해 저절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사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는 조건만 맞으면 산만한 다이아몬드가 생긴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것이 생길 수 있지만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합리적으로 사유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진리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영국의 로크 같은 이는 인간에게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태어날 때에는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의 감각과 경험이 쌓여서 이성이 형성되며 보편적 경험이 진리로 인식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경험론의 문제는 천 번을 똑같은 것을 경험을 했다고 한들 천 한 번째에는 다른 일이 벌어질 수가 있기 때문에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는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는 문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철학사조 모두 진리 인식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그래서 칸트라는 철학자는 이 두 이론의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절충론을 내었다. 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하는 것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신과 같은 속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이성은 경험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어린아이나 바보들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서는 진리라던가 신의 뜻이라던가 이런 것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신성과 진리를 알 수가 없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이다.

 

그러면 신의 뜻과 진리를 인간이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선악을 구분하며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 수가 있는가? 하는 그런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에 대한 비판철학이 바로 실천이성비판인데,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올바르게 살 수 있느냐?

여기에 대해 그는 갑자기 철학자가 아니라 도덕군자가 되어 윤리적 주장을 한다. 즉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마음속에 도덕률이 빛나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도덕적인 본성의 흐름에 따라 선하게 살아야 하며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정언명법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다.

 

그런데 칸트는 이런 주장을 하고 난후 한계를 느끼게 된다. 자기가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데 이성과 행동 사이의 갭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해결하려고 판단력비판을 발표하게 된다.

 

‘판단력비판’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진리라던가 아름답다던가 하는 기준은 이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가 아름답다던가 선하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철학사에 있어서 칸트가 일으킨 거대한 가치관의 혁명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서구철학은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철학의 이성적 영향을 받아, 진리라는 것은 그 자체가 진선미를 갖추고 완전한 조화가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선하고 진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칸트에 와서 사회가 가치가 있고 아름답다고 보기 때문에 진리가 되고 가치가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진리가 절대적 가치를 갖춘 진리에서 사회적인 여론에 의해 결정되는 상대적인 진리로 진리관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에서 철학적으로 최고봉에 올랐다는 칸트의 3대 철학비판이론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론이다.

 

진리적 관점에서는 너무나 어이가 없지만, 중생의 시각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 서구 근대철학의 핵심적인 결론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가치관아래 서구의 물질문명은 이성을 기반으로 급격히 발전해 갔다. 서구인들은 그들이 이성을 기반으로 합리적인 것을 발전시키면 선하고 행복하며 끝없이 발전하는 지상천국이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로 흘러갔다.

합리적 이성과 진리를 기준으로 발전시킨 자본주의 문명은 빈부격차와 환경파괴로 인간소외와 심각한 사회분열을 가져왔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세상은 파멸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 신을 대신해서 주체적인 이성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생활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종교개혁으로 신을 버리고 산업과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켜 왔는데 결국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온 현실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신의 뜻이라든가 진리를 알고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제 철학은 그런 근원적인 신의 뜻과 진리를 알려고 하는 시도를 포기하고 이 세상 속에 흐르고 있는 본질적인 흐름에 따라서 거기에 맞춰 충실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생명의 본질적인 흐름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생의 철학이라고 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은 세상이 고통스러운 근본 이유는 인간이 끊임없이 욕망과 살려고 하는 의지를 내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힌두철학의 영향을 받아 세상의 고통과 번뇌는 인간의 살려고 하는 생의 의지 때문이라고 인간에게 있는 소멸의 의지, 사의 의지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본다. 그래서 살려고 하는 욕망과 의지를 모두 다 지워버렸을 때 인간은 자유와 평안과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당시에 어지러운 세기말 상황에 방황하던 젊은이들한테 대 히트를 쳤던 것이다. 그래서 서양 염세주의 철학의 시조가 된다.

 

다음으로 니체라는 사람은 권력에의 의지가 세상의 본질적인 흐름이며 인간의 삶의 의미라고 주장하게 된다. 세상은 인간에게 진리를 찾고 선악을 추구하며 도덕적으로 살라고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쟁취하고 살려고 하는 권력에의 의지가 본질적이며 이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가운데 삶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선악을 구분하여 무엇을 지키고, 피하는 기독교 윤리를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노예 도덕이라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고 쟁취하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철학은 당시 히틀러 나치즘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현실에서 욕망을 쟁취하는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반적인 흐름과 통하고 있다.

 

다음에는 베르그송이라는 사람의 생기론이 있다. 그는 이 세상에는 생명력이 흐르고 있어 끊임없이 진화하여 완성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고 본다. 즉 인간에게는 진화하려는 생명력의 흐름이 있어 끊임없이 창조적인 진화를 하며 도덕적이고 완전한 인격을 지향하고 있는데 인간은 그 흐름에 따라 살 때 비로소 생명의 본질에 충실하게 된다고 본다.

 

이처럼 서양철학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동원해서 아이디어를 내어 가지고 치밀하게 논리를 구사하여 이론을 만드니까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 그러한 논리들은 장님이 코끼리만지듯 세상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작은 지식과 경험을 논리로 짜 맞춘 단편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니 보는 사람마다 주장과 시각이 다 달랐고, 그런 단편적 논리들을 많이 알아봤자 생명과 세상의 본질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현실은 더욱 악화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수백만의 인간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반인간적인 대규모 인종학살과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나가서 하루살이보다 무의미하게 죽어 시체로 강과 산을 메우는 상황에서, 인간의 가치라든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조차 없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래서 과연 인간이 가치있는 존재이며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알고 올바르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게오르규의 25시라는 말처럼 이렇게 무의미하고 저주받은 세상은 끝이 나야 당연한데 그런 절망 속에서도 이 세상이 이어지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순된 상황 속에 실존철학이 나오게 된다.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을 이성으로 정의되지 않는 불합리적이고 우연이 가득한 존재로 본다. 그래서 신학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는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을 갈망하는 고독한 존재로서 오직 신을 만날 때만이 인간은 그런 한계상황에서 벗어나서 평안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르트르 같은 사람은 인간이란 아무 의미가 없이 내던져진 존재로서,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없는 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구토라는 말을 한다. 인간이 종교개혁으로 무한한 자유와 이성을 찾아서 신의 품을 떠나 왔는데, 깨어 있는 이성을 가지고 무한한 대양과 같은 세상에 홀로 나와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망망대해 속에서 멀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 남은 인간은 그러한 구토 속에서도 뭔가 의미를 찾아야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삶속에서도 스스로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실존에 충실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문명이 근본적으로 부딪힌 질곡이며 인간이성의 한계이다.

 

그런데 최근 이곳에 어떤 분이 오셔서 자신이 매우 이성적이며 완전한 진리를 알고 있다는 듯이 이곳의 문제점을 평가했다.

 

그는 이곳에 온지 하루 만에,

진리가 없이도 계속 발전하여 해탈에 이를 수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곳의 진리는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와 같으며 증거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의 해탈이 인과법에 의해서는 말도 할 수 없는 상상속의 해탈의 경지라고 왜곡하고

어떠한 삶을 산다고 해서 해탈하거나 지옥으로 가는 게 아니며 그저 계속 순환할 뿐이며 우리는 그 순환의 한 점으로 있을 뿐이라고 자신있게 선언했다.

 

그러면 그 말의 모순을 살펴보자!

 

그는 진리가 없이도 완성에 이를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직도 인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을 보지 못한 중생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눈뜬 장님인 중생이 어떻게 스스로 진리를 알아보고 옳고 그름을 바로 알아 자신의 운명을 좋게 만들 수 있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을 책임진 위정가는 물론 아무리 악한 사람도 누구나 착하게 살고 싶고 좋은 운명을 만들고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항상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일과 이치를 바르게 몰라 세상이 움직이는 것과 달리 원인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눈뜬 장님인 중생이 좋은 원인을 지어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인연을 만나야 한다고 하셨던 것이다.

 

인과의 법칙상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인간도 진리의 인연을 만나 자신 속에 좋은 것을 집어넣지 않으면 결코 스스로 좋아질 수가 없다. 그는 이러한 엄연한 인과법을 알지 못하니 진리를 모르고서도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을 함부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진리는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와 같으며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실과 이치를 중시하며 모든 것을 현실 속에서 확인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일들은 현실 속에 그 증거가 있다.

 

그 증거를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것은 이치를 볼 줄 아는 맑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진실성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마음에 진실이 없는 자는 아무리 진실을 보여주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세상이 윤회하는 증거를 보여주어도 눈앞에 영혼이 윤회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런 자들은 진리와 인연이 없는 자이니 더 이상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죽지 않으면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부류들이다.

 

그리고 이곳의 해탈이 인과법에 의해서는 말도 할 수 없는 상상속의 해탈의 경지라고 왜곡하고 있다.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지어내는지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해탈을 부지런히 선업을 지어 그 결과로 다가오는 삶의 열매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인과법에 의해서도 말할 수 없는 상상속의 해탈의 경지라고 왜곡하는가?

 

그는 인과율이 당연한 법칙으로서 인과율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사후세계에 관한 경우 영혼의 순환의 의하여 그저 해탈없이 순환만 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가 해탈했다는 것보다는 그냥 죽은 게 다라고 하는 것이 인과율에 합당하며 해탈이나 창조주나 진리와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 개념과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로써 영혼이 죽으면 그냥 다른 영혼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인과율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인과율에 의해 지은대로 받는 것이다.

인과율을 받아들인다는 사람이 각자 영혼이 지은 것이 다른데 어찌 지은 것과 관계없이 결과의 차이없이 동일한 순환을 하겠는가? 지은 것이 다르다면 순환을 해도 순환의 결과가 다른 것이 인과율의 당연한 결론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기본적인 사칙연산도 못하는 사람이니 인과율을 논할 가치조차 없다.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면 매우 좋은 결과인 극락을 만나는 영혼도 있을 것이고 매우 나쁜 결과인 지옥을 만나는 영혼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후의 결과를 모르면 알려고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인 것이지 종교적인 것이라고 부정하고 차별이 없이 그저 순환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과율을 무시한 비이성적인 자세이다.

 

그리고 진리는 변하지 않으며 그 자체이기에 아무 것도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해탈을 할 필요도 해탈이라는 개념도 없으며 우리는 이미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진리와 하나가 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진리 속에 있는 뜻을 모르고 단순히 논리에 취해 진리 속에 있으니 그저 흘러가는 세월 따라 살아가면 된다고 말을 하는 것과 같다. 도에 취해 세상을 망친 동양의 순환론의 망조가 깃든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결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인과의 껍데기(형식)만 알고 인과의 참뜻(내용)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 죽이는 것이다.

 

하늘이 완전한 법계를 만들어 완전한 인과의 이법으로 이 세상을 유지해나가는 것은 무조건적인 존재 유지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과의 이치를 통해 하늘이 인간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은 지은대로 받으니 이를 깨우쳐, 지키고 행하고 베풀어 하늘이 지은 완전한 뜻을 이 세상에 실현하라는 것이다.

 

인과율 속에 있는 뜻은 지은대로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우주의 진실과 이치대로 살면 실해져 완성되는 것이며 이 우주의 진실과 이치에 어긋나게 살면 부실해져 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실과 이치를 맞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농사의 진리는 무엇인가?

뿌리고 가꾸어야 풍년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 속에 머물면 된다고, 씨도 안 뿌리고 날씨도 안 살피고 가꾸지도 않으면 영원히 좋은 결실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풍년을 얻고자 하면 반드시 농사를 잘 짓는 농부를 만나 그 요령을 배우고 때를 맞춰 씨를 뿌리고 가지를 쳐주고 거름을 주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해탈도 반드시 세상을 이루는 진실과 이치를 배워 옳고 그름을 알고 자신을 좋게 만드는 원인을 지어야 좋은 선근이 쌓여 인간완성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삶을 산다고 해서 해탈하거나 지옥으로 가는 게 아니며 그저 계속 순환할 뿐이고 우리는 그 순환의 한 점으로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순한 존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자기를 짓기 위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오직 움직임만이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뜻을 모르고 형식논리에 빠져 그저 한 점에 서서 흘러가는 대로 지낸다면 그 결과는 세상의 엄연한 인과법칙에 의해 외롭고 불행한 현실을 선물받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시각으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악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 살인, 살육, 강간 등 비인간적인 모습을 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 중에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잘 자는, 죄의식조차 갖지 않은 자들이 있으며 세상은 권선징악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세상의 악한 현실을 말할 때 반드시 그에 대한 뜻도 말해야 한다.

 

세상이 악한 것은 인간이 이치를 어겨 인과에 맞지 않는 결과를 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잘못의 결과로 세상의 이치는 어그러져 불행한 현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세상은 반드시 그에 상응한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인과율을 껍데기만 안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악한 현실만 알면 매우 위험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단순히 이 세상이 악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자신도 그렇게 행동을 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이 함부로 살게 되고 불행한 결과를 스스로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탁악세의 탁류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행한 모습인 것이다.

Comments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진실의 근원 ginc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