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6. 단돈 10원의 밑천 본문
나는 나의 앞에 섰던 사람이 하던 대로 먼저 10원짜리 한 장을 건네 주었다. 돈을 확인한 상대가 신문 한 장을 건네 준다. 그곳에 있던 신문장사 속에서도 꼬마였던 나는 건네 준 신문을 움켜 쥐고 길거리로 나가면서 다른 애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그 흉내를 내며 뛰어갔다. 내일 아침 국제신문! 하고 외치며 달리는 나의 발길을 붙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고, 한 장의 신문은 20원의 돈과 바뀌었다.
나는 다시 신문사로 뛰어갔다. 긴 줄은 다 끊어져 나가고 없었다. 즉각 신문 두 장을 받아 쥔 나는 의식없이 소리만 외치면서 길거리를 뛰었다.
「내일 아침 국제신문.」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신문은 그 날 따라 잘 팔렸다. 몇 번씩이나 나는 신문사를 들락거렸다. 나의 주머니 속엔 100원짜리도 10원짜리도 여러 장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신문은 점점 팔리지를 않았다.
나는 어두워지는 변두리 길을 다니면서 신문을 팔았다. 희미한 전등불이 켜지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길을 뛰어 다녔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나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돈이 생기는 것이 신나고 행복하였다.
그 날 내가 모은 돈은 360원이나 되었다. 흠뻑 땀에 젖어 가지고 집에 들어가니 형수는 등신같은 게 때도 제 때에 못들어 온다면서 푸념을 늘어 놓았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여느 때처럼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작은 양재기 그릇에 식은 강냉이가루 죽 한 그릇을 간장을 쳐서 비벼 먹고는 의젓하게 앉아 있었더니, 형수는 더욱 약이 오르는지 얼굴에 표독한 빛을 떠올리며 금방 무슨 말이든 하려는 표정이었다.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돈 200원을 얼른 그런 형수 앞에 내어 놓았다. 돈을 본 순간 형수의 표정은 금방 달라지며 얼굴에 웃음이 흐른다.
「돈이 어디서 났소?」
형수는 돈의 출처가 궁금한지 나에게 물어 왔다.
「내사 신문장사 안 했능기요.」
하는 나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형수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금새 눈시울까지 적셨다.
나는 어린 소견에 이 여자도 악인은 아니여 하는 생각을 하며 그 날 밤은 깊은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은 통금해제 싸이렌 소리를 듣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160원을 지닌 채 희미해져 가는 별들을 보며 나는 영도 섬의 새벽 길을 뛰기 시작했다.
신문장사를 하며 알게 된 어제의 아이들이 이야기하던 곳으로 신문을 받으러 찾아간 것이다. 토성동 개다리 옆에 있었던 <동아일보 부산분실>이란 간판이 달린 건물 주위에는 신문팔이 소년들로 득실거렸다.
먼저 온 아이들이 쇠창살 앞을 가로 막고 뒤로 길게 줄을 이어 서 있었다. 나도 나의 차례를 위해 줄을 섰다. 금방 나의 뒤에도 줄이 이어져 나갔다. 같은 처지의 소년들이라 이야기 하기도 쉬웠다.
「신문은 언제쯤 나오노?」
하고 뒤에 선 아이에게 물으니 곧 올 것이라고 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자전거가 신문이 가득 실린 리어카를 끌고 왔다. 건장한 소년들이 그 리어카를 밀며 뛰어 오자 삽시간에 왁자지껄해진 속에서 아이들은 아귀처럼 서로 줄에 붙어 먼저 신문을 받을 양으로 밀어 부쳤다.
나는 내 차례가 되어서 가진 돈만큼의 신문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 신문을 움켜 쥐고
「동아일보요! 동아일보요!」
하고 외치며 이 길 저 길로 바쁘게 뛰었다. 앞에서 뛰던 아이가
「동아일보요! 특보요!」
하며 다른 말로 외쳤다.
그 때는 선거기간 중이라서 신문이 다른 때보다 잘 팔렸는데,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 선생이 갑자기 죽었다는 뉴스가 신문팔이 소년들한테는 사회의 충격만큼이나 힘차게 뛸 수 있는 하루였다.
한낮이 되면서 다방과 상점에서는 동아일보를 찾는 사람이 많았고 신문이 모자라서 동아일보 1장에 50원씩이나 값이 뛰었다.
어찌되었건 당장은 신문팔이 소년들은 신이 났다. 나는 그 하루 동안에 아침 겸 점심요기까지 하고도 800원이나 모았던 것이다.
내가 밤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죽그릇이 어제와는 달랐다. 다른 때처럼 밥그릇이 아니고 좀 더 큰 양재기에 식은 죽이나마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신문장사로 나다니면서 세상 살아가는 법을 알려고 노력했다.
선거가 끝나니까 신문은 열심히 뛰어도 잘 팔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나다녔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자 신문장사는 더욱 힘들었다.
어떤 곳은 토박이가 있어 드나들지도 못했다. 그런 것을 모르던 나는 어느 날 큰 봉변을 당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어느 다방에서 신문 한 장을 팔고 나왔는데 누군가가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옆을 쳐다 본 나는 나보다 나이가 더 든 아이들에게 끌려가서 몰매를 맞았다.
옷이 찢겨지고, 온 얼굴에 멍이 들었고 신문도 찢겨졌다. 나는 그때 공포 때문에 울기 조차도 못했다. 심지어는 칼을 목에 대고 찌르려 하면서 한 번만 더 들어오면 죽이겠다고까지 했다. 아무도 나를 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반죽음이 되어서 일어나기 조차 못해 신음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더럽다는 듯이 나의 몸 위에다 침을 뱉으면서 가버렸다.
나는 한 번 당하고 나서부터는 조심이 생겨 텃세가 심한 곳은 피해 다녔다.
신문은 잘 안 팔렸다. 그런데도 이제 나의 사정은 달라졌다. 형수는 내가 돈을 벌어오길 기다렸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것보다 신문을 들고 낯선 골목길을 헤매며 다니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나의 생각에는 무슨 일을 하면 어린 내가 돈을 좀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어느날 신문이 잘 안 팔려서 그냥 걸어가다가 길가에서 아이스케익을 팔고 있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그도 아이스케익이 잘 팔리지 않는지 통 위에 앉아서 아이스케익 하는 소리만 계속 내어 지르고 있었다.
나는 신문을 든 채, 그 소년 옆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하루 얼마나 버니?」
그는 질문을 하는 나의 얼굴을 싱겁게 쳐다보며 말했다.
「응 600원 정도야.」
더 많이 버는 사람도 있다고 말을 했다.
나는 600원 이란 수입에 그만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거니?」
나는 또 어떻게 하면 아이스케익 장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소년은 나한테 통 값은 얼마를 걸어야 하고 아이스케익을 받을 때의 값은 얼마를 낸다는 등을 가르쳐 주었다. 1개를 팔면 4원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그 소년과 약속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아이스케익집 앞에서 그와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통 값 1,800원이 약간 문제였지만 신문장사 밑천을 보태고 형수한테 얼마를 받으면 되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음날은 신문장사를 그만 두고 아이스케익 장사로 전업을 하였다.
아이스케익 공장 사람들은 내가 너무 어려 보이는 모양이었지만 굳이 하겠다고 사정을 하고 나서니, 아이스케익집 주인도 잘 해 보라고 하면서 승낙을 하였다.
한여름의 날씨는 얼음 통을 어깨에 걸친 몸에 땀이 쭉쭉 흐르게 하였다. 신문장사 때처럼 활동이 간편하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아이스케익 통은 무게가 있었고, 처음 시작하니 생각보다 어색한 것이 많았다. 당장 급한 것은 아이스케익이란 소리가 입 속에서 맴돌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몸에 비해 무거운 통을 메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가 시청 근방에 와서 눈을 딱 감고 용기를 내어서 아이스케익 하고 외쳤다. 그때 누가 내 등 뒤에서 아이스케익을 달라고 하였다.
나는 멋진 폼을 내면서 아이스케익을 통에서 끄집어 내어 손님에게 주고 통 뚜껑을 닫았다. 그때 케익을 산 소년이 내게 물었다.
「너 케키 장사 하나?」
나는 고개를 들고 손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내 눈 앞에는 고향에서 같은 동네에 살던 소년이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고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멋적게 웃었다. 그는 10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그제사 말이 튀어나온다.
「그냥 두어.」
그러나 그는 억지로 돈을 받게 하고는 많이 팔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멍청히 거리만 주시하다가 너무나 초라해 보인 내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운 마음을 느꼈다.
통을 둘러맨 나의 머리 속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발길이 움직이는 대로 걸어갔다. 자리를 잡은 곳은 시청 뒷 편 바닷가의 선창가 였다. 오고 가는 사람조차 뜸한 인적없는 곳에서 통 위에 앉아 오랫동안 바닷물만 쳐다보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도 잠시도 편안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운 옛날 생각에 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뺨 위로 흘러 내렸다.
간간히 지나던 사람들이 아이스케익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사 주었다.
나는 바보처럼 하루종일 멍청하게 있었는데, 하늘에는 노을이 지기 시작하였다. 선선한 바다 바람은 땀도 멈추게 해버린 것인지, 지나는 사람들도 더 아이스케익을 사먹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비로소 정신이 조금 들어서 아이스케익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통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니 아이스케익은 보이지 않고 나무꼬지와 단팥죽으로 변해버린 아이스케익 녹은 물이 보였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으나 버리기에는 밑천이 든 물건이 아까웠다. 양철통을 통 안에서 끄집어 내어서 나무꼬지를 집어내기 시작하였다. 밥 대신 그 물이나 마셔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통에서 주어 낸 나무꼬지는 23개나 되었다. 23개의 아이스케익이 녹은 물을 먹으니 미적지근한 케익 물은 정말로 맛이 없는 음식이었다. 나는 빈 통을 챙겨 둘러메고 전등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길을 걸으며 케익공장을 찾아갔다.
공장의 기술자가 어린 날 보고 다 팔았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빈 통에 얼음을 채우고 다시 50개의 케익을 통에 받아 넣었다.
먼 곳에 보이는 변두리 마을의 불빛을 보며 목청을 돋구어 어둠을 향해 외쳤다.
「아이스케익, 맛있는 아이스케익.」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한다는 집념이 나를 숨가쁘게 뛰어다니게 했다.
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몸은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입은 소리를 내지른다.
뱃속에서는 먹은 게 없는 데도 이상한 소리를 낸다. 꿀렁꿀렁 뱃 속이 흔들리는가 하면, 6·25사변 때 들은 기관총 소리를 내기도 했다.
뱃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요동이 심해 갔고 통증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도 온통 생각은 밑천을 날리는 것이 걱정이 되어서 죽으라고 움직이며 외친다.
어서 아이스케익을 다 팔아야 하는데, 저녁 때 먹은 케익 녹은 물이 몸에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느끼면서 식은 땀마저 흘리며 밤을 이겨내었다.
하루 저녁을 보내고 나니 고통은 멈추었지만 온 몸에 힘이 빠진 것이 만신창이었다. 좀 있으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모처럼 시작한 장사를 하루라도 빼먹고 싶지 않아 나는 다시 이이스케익 공장으로 나갔다.
뜨거운 한여름의 땡볕 속을 나는 열심히 아이스케익 장사로 시간을 채웠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기운을 느끼면서 길거리에는 얼음장사가 한 사람, 두 사람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스케익 장사들은 대부분 전업을 서둘렀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혼자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을 곰곰 생각해도 머리 속에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다 못해 나는 해볼 만한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쏘다녔다.
세상에는 13살짜리 소년에게 줄 일거리는 많지 않았다. 어느 날은 사람들이 없는 영도의 고갈산 꼭대기까지 혼자 올라갔다. 칡뿌리라도 하나 캐고 싶었는데 어디에도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큰 숨을 몰아 쉬었다. 저 멀리에 또 다른 섬들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 왔다. 더 가까운 바다에는 배들이 오고 가는 것이 보였고 섬 주변에서는 무엇인가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호기심과 혹시 저 곳에 내려가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길도 없는 산비탈 길을 마구 내려갔다.
휘파람 소리처럼 길게 숨을 몰아 쉬며 해녀들은 해안의 물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 위에 떴다가 곤두박질을 하면 1∼2분 정도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곤 했다.
나는 다른 일도 없고 해서 그 사람들의 일하는 장면들을 계속 주시하는 동안 여자들이 나오는데 모두 그물망태기에 가득 채운 해물들을 힘겹게 메고 나왔다.
그들이 잡아 온 물건은 시장에서 파는 것들이었으며 상당한 돈이 될 듯도 싶었다. 바다에는 임자가 없는지 아무라도 일을 하는 것 같았다. 해녀들은 숫자가 꽤 많았다.
나는 해녀들의 주위에 접근하여 얘기도 듣고 작업을 해 온 물건들도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임자없는 저 넓은 바다에서 무슨 일이든 일거리를 찾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 날 저녁 나는 동리 앞 문방구점에서 30원짜리 잠수경(潛水鏡) 하나를 구해와서, 행여나 그 수경에서 물이 샐까봐 밤새도록 양철과 유리 사이에 초 땜질을 하였다.
다음날 날이 새자 아침이라고 죽 한 그릇 얻어 먹고는 밀가루 푸대 하나를 구해서 똘똘 말아 옆에 끼고서 인적이 뜸한 바닷가를 찾아갔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곳을 찾다 보니 길도 나지 않은 험한 산비탈과 위험한 벼랑을 몇 번이나 타고 넘어가야 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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