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종교의 거짓 본문
오늘날 현대사회는 잘못된 지식의 홍수 속에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문제가 종교에 의한 거짓과 환상이다. 종교를 믿으면 세상을 더욱 정확히 보고 인격이 고상해져야 하는데 오늘날 종교인들은 일반인보다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무지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법화된 종교가 성자들이 본래 밝힌 가르침을 왜곡하여 환상과 거짓과 미신과 유혼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심각한 문제가 오늘날 종교가 유혼을 전파하는 귀신놀음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는 사실로 우리나라 신흥 종교의 광신적 신놀음은 사회의 건강성을 파괴할 정도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종교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세상을 망치는 어둠이 되고 있으니 오늘날 종교를 종교를 믿는 자 중에는 구원을 받을 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오늘날 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신에 의한 구원과 공이라는 깨달음의 허구이다.
지금 종교인들은 자신이 보지도 듣지도 확인하지도 못한 전해들은 관념을 마치 진리인 듯 세상에 전하며 악업을 짓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러한 말법의 영향으로 잘못된 구원과 깨달음의 환상을 가지고 자신과 세상을 망치고 있다.
인간은 삶을 통해 정신을 밝히는 활동을 함으로써 좋은 영혼을 만들어 구원을 받게 되는데 세상을 헤매는 어두운 신의 기운을 받아들여 정신이 흐려지고 공이라는 헛된 관념을 받아들여 지은게 없으니 구원을 받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말법에 빠져 무엇인 진리인지 무엇이 정법인지 알지 못한다.
불교는 공이라 하고 기독교는 믿음이라 하지만 모두 틀렸다.
우리의 삶의 기반인 자연 속에 본래 드리워져 있는 사실적인 법칙 즉 이 세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치가 바로 진리이며 정법인 것이다.
이 진리의 법칙은 예외가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이 주체로서 자신이 지은대로 받는 것이지 깨달은 자의 음덕이나 신의 가피에 의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사실적인 진리를 밝혀 자신의 영혼을 좋게 하는 공덕을 짓는 것이 오직 유일한 길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진리를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겼기에 자신과 조국을 축복하는 원인을 짓지 못했으며, 존재하지 않는 신의 구원을 믿고 이치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했기에 민족의 정신과 나라를 망치고 수천년간 세상에서 버림받는 유랑생활을 했던 것이다.
자신을 망치는 행동을 하는 자는 신도 구해주지 않는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신에게 미루는 자는 매우 어리석은 자이며 올바른 삶의 길을 모르는 무지한 자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아무도 실체를 알지 못하는 환상 속의 신을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이유는 세상을 떠도는 어둡고 악한 유혼들이 인간의 섬김을 받기 위해 인간을 무지와 환상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지금 인간세상은 무지하고 악한 어둠의 신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어둠이 짙어지면 결국 세상과 인간은 그 수명을 다하여 변화기를 맞고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는 것이다. 말세가 오는 것은 하늘이 인간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진리를 멀리하고 신과 환상을 좋아해 진실이 망해버린 결과로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자는 아무도 이 땅에 와서 신의 이름을 팔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인간들에게 거짓된 신의 환상을 깨고 하늘의 뜻과 어김없는 자연의 이치를 실천하라 깨우치셨던 것이다.
높은 차원의 신은 이 세상에 내려와 떠돌며 인간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신이 나타나 진리를 전하거나 세상일을 해결한 적이 없다. 모든 진리는 인간의 몸을 지니고 태어난 성자들에 의해 나타난 것이며 모든 역사의 주요한 사건은 인간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조물주 하느님은 완전한 세상과 진리를 만들어놓고 각자가 지은대로 받는 공명정대한 법칙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고 있을 뿐이다. 높은 차원의 신이 이 세상에 내려와 활동하려면 반드시 인간의 몸으로 환생해야 한다. 몸이 없는 신이 이 세상에 내려와 활동하게 되면 그 기운을 상하여 낮은 차원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끈적 끈적한 이 세상에 높은 차원의 신이 직접 내려와 세상 일에 간섭하는 일은 없으며 이 세상에 나타나 심령현상을 일으키는 신들은 거의 대부분 생명의 이치를 모르고 세상을 헤매고 있는 저급한 유혼들이나 인간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악한 신들인 것이다.
이를 안다면 오늘날 신의 구원을 자랑하며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불쌍한 존재이며 신을 팔고 다니는 자들이 얼마나 큰 악업을 짓고 있는 지 잘 알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오직 기독교만이 하나님에게 선택된 종교이며 기독교를 믿는 나라만이 축복을 받아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신을 섬겨 잘 된 나라가 없다. 진리를 버리고 신을 섬기던 이스라엘은 진리를 전하던 예수를 죽이고 나라를 잃고 세상을 떠도는 유랑민족이 되었으며 그리스 로마 문화의 철학과 이성을 버리고 기독교를 국교로 택한 로마와 중세 유럽국가들은 곧바로 천여년간의 중세 암흑시대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유럽이 선진국가가 된 것은 중세 기독교의 맹목적인 믿음과 신의 구원이라는 허위의 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와 창의, 그리고 진리를 실천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기독교의 주장대로 기독교가 유럽을 성공시킨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봉건적 독재에서 벗어나 자유와 진리, 인간의 가능성을 분출함으로써 오늘날의 유럽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불교에서는 공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세상을 공이라고 하신 적이 없다.
부처님은 반야를 증득하여 깨달음을 얻으셨으며 세상에 있는 모든 법을 보셨다고 하셨을 뿐이다. 부처님이 공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해탈하신 후 완전히 맑게 정화된 내면의 경지를 말씀하신 것이지 이를 관념적으로 확장하여 우주의 실체를 공이라 한 적은 없는 것이다.
홀로 고요히 있으면 모든 것이 맑게 개인 영원한 자유와 평안인 반야에 들고
깨어나 세상과 만나면 그 맑은 마음에 세상 일을 있는 그대로 비쳐 삼계를 보시는 것이 깨달은 자의 진면목이니 그 외에 다른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이 세상을 공이라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며 사실을 보는 얕은 깨달음을 넘어서서 우주가 공이라는 실체를 깨닫고 그와 하나가 되어야 진정한 정득각을 이룬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눈앞의 일도 보지 못하면서 우주가 공하다는 중도를 깨달아야 진정한 대각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관념에 빠져 사실을 외면하는 눈먼 장님들의 억지인 것이다.
이 세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최고의 깨달음이다.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안다면 더 이상 알 것도 깨우칠 것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보았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일 속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그 속에 깨달음이 있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고 삼계의 실상이 있고 우주가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일에 대해서도 명확히 안다면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에 맞는 것보다 더 옳은 것은 없다. 아무리 듣기 좋은 소리라도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현실이며 환상이며 거짓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가장 좋은 가르침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삶이 참되고 부실함이 없지만 사실이 아닌 거짓과 환상을 믿고 행한다면 모든 일이 잘못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개공의 의미는 결국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이란 것이 본래 생겨나지 않았어야 할 거짓되고 더러운 곳으로 사람이 살 곳이 아니며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니 가능한 빨리 이 삶을 던져버려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허망하고 염세적인 말법이 번진 동양사회에서 세상을 밝게 만들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고 무지와 허무주의가 번져 세상이 어둡고 불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염세적 주장은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과는 어긋난다. 부처님은 삼계를 모두 보시는 정등각을 얻어 삼세의 진실을 모두 보시고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그 속에는 모든 길이 다 주어져 있으니 인간으로 태어난 이 축복된 시간을 열심히 진리를 배우고 깨쳐 해탈에 이르라는 참으로 축복된 메시지를 길을 모르고 어둠에 헤매는 인류에게 최초로 가르쳐주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은 축복과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지 오늘날 불교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고통과 염세와 허무의 메시지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공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불교 속에 들어온 것일까?
처음 부처님이 가르침을 펴실 때 당시 인도사회와 제자들은 전통적인 힌두교의 염세적 관념 속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초기 불교가 세상에 나타날 때부터 힌두교의 사고와 관념에 물든 제자들에 의해 불교 속에는 조금씩 힌두교의 마야(환)사상에 의한 허무주의와 염세주의 사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러한 힌두교의 관념은 초기 부처님 가르침의 생명력이 살아있을 때는 희미하게 존재했지만 정법 500년이 끝나고 상법 500년이 시작되어 대승불교가 일어날 시점에는 본격적으로 불교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초기 200년간은 입에서 입으로 불교가 전해지던 구전불교시대였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제자들이 사명감으로 인도전역으로 흩어져 부처님법의 진리성을 설파했을 것이며 각자의 불완전한 기억과 지식과 논리로 불교를 전파해나가면서 불교의 완전함이 오염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불교의 가르침은 구전으로 10여세대가 지나면서 더욱 왜곡되었을 것이며 제3차 불전결집이 일어났을 때 불교 속에는 두가지 커다란 흐름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가섭존자로부터 전통적으로 교리를 이어내려온 고승들이 즐비한 상좌부의 견해로 부처님이 깨달음의 눈을 얻으시고 세상의 실상과 사실간의 인과의 이치를 밝혔다는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관념적인 철학성을 강조하는 대중부의 견해로 상좌부의 사실적인 가르침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고 진정한 가르침은 비의로 전해진 고차원적인 공성이라는 것이다.
대중부 논사들이 부처님법의 실상법과 인과법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공이라고 주장하자 초기부터 가섭존자의 정통성을 받들어 부처님의 유위법과 인과법을 지켜오던 기존 상좌부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존 상좌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시도는 힌두교의 관념적인 말법으로 부처님의 사실적인 정법을 파괴하려는 악마의 음모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좌부와 대중부는 사활을 건 투쟁을 벌이게 된다. 사실 싸움이라 할 것도 없었다. 상좌부는 인도사회로부터 불교 자체로 인정받는 정통성있는 교단이었지만 대중부는 기존 제도권에 이견을 가진 소수의 반항적 집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리논쟁은 상좌부에서 이단인 대중부 논사들의 외도를 단속하는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일반적인 인도불교는 상좌부의 실상법과 인과법이었다.
그리하여 대중부는 단속과 제재의 대상이 되어 기존 제도권 불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도불교의 제도권에서 쫒겨난 대중부 논사들은 인도 불교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종교인으로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인도 불교계를 이끌어가던 정통성있는 상좌부의 기본 교리를 깨고 자신들의 교리의 정당성을 입증하여 주도권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대중불교운동으로 발전해 나중에 대승불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문제삼은 것은 상좌부의 기본교리였던 실상법과 인과법이었다. 그들은 정통적인 불교교리였던 상좌부의 유부이론(실상법)에 대해 고도의 철학적인 힌두적 관념과 논리를 활용하여 비판을 가했다. 그들은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인 유위법에 대해 마야(환, 공, 무실체성)성을 확장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인도불교사에 있어서 무위법의 확대는 바로 이러한 대중부파의 기본적인 입장과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하여 부파불교간의 논쟁에서 대중부는 일체 법(현상)의 실체를 부정하는 무위의 범위를 확대해 나갔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이 바로 공사상을 중심으로 한 용수의 중론인 것이다.
이러한 대승불교는 인도 내에서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일종의 금서로 존재하다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고 동북아시아로 불경이 한꺼번에 넘어오면서 이러한 사실적 관계를 모르는 중국인들이 대승불교가 갖는 추상성과 논리성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인 아함경보다 중생들이 만든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대승경전을 더 높이 인정받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보인 것이다.
동아시아에 들어온 공사상은 그동안 부처님이 가르치신 사실적인 인과법을 하근기를 위한 낮은 단계의 가르침으로 치부하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공사상을 최고의 깨달음으로 보아 이를 깨치기만 하면 누구나 해탈을 얻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처님의 엄격한 가르침과 지은대로 받는 사실적 인과관계에 부담을 느끼는 거짓된 자들은 과거에 지은 업과 관계없이 앉아서 한 소식만 하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일확천금의 비결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선불교가 호황을 맞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생명처럼 여기는 공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사상의 정체이니 이는 부처님이래 계속 되어온 정통불교가 아니며 오늘날 동남아 불교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종교는 초기 성자들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오히려 인간세상을 병들이고 있으니 진리의 실상에 눈을 뜬 우리들은 이러한 종교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눈앞에 존재하는 사실과 다른 거짓과 환상을 널리 깨우쳐 좋은 삶을 짓고 좋은 인간과 좋은 세상을 만드는 공덕을 지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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