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죽음 본문

☆ 진실의 근원

죽음

gincil 2013. 4. 10. 14:27

생명의 이치를 알고 자각하는 것이 

자신의 후생을 올바르게 이끄는 주요한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며 기본적으로 자신의 업이 가벼워져야 합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지만 생각만으로 되는 일은 없으며

자신 속에 그런 근본이 갖추어져야만 그에 상응한 결과를 보장받게 됩니다.


김연아가 일등을 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어찌 우승을 하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노력을 하고 체력과 기술이 몸에 체화될 때 

우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계를 떠돌지 않고 윤회를 하겠다는 생각은 올바른 지식(정견)입니다.

이러한 올바른 지식을 근거로 깨우침이 따라오며

행동이 달라지고 업이 가벼워집니다.

따라서 중요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

반드시 업이 정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 몸과 영혼이 분리될 때

잠시 과거의 의식을 그대로 간직하다가

곧 각자 지은 영혼의 결실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됩니다.


높은 근기에 이른 의식들은 각자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고

윤회를 하는 인간은 깊은 잠 속에 빠져들며

집착과 욕망과 한이 많아 유혼이 되어 헤맬 영혼은 

혼침한 꿈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꿈속에 아무리 달아나려고 해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듯

이미 의지가 그의 통제밖에 있고 업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신의 사후운명을 어찌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정견에 대한 자각은

헤매임을 단축시키고 혼침 속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작용하겠지만

(한번 지은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오기에)

기본적으로 한동안 업의 노예가 되어 헤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치를 지식으로 안다고 해서 

어찌 한과 집착의 충동에서 벗어나 더 나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의지의 힘보다 업의 힘이 더 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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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끝없이 도는 윤회의 과정 속에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귀한 인연을 만나 이 생에 태어나

자기 농사를 짓고 돌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는 좋은 결실을 거두어 완성에 이릅니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동물과 같이 생물학적 삶만 사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고귀한 의미를 모르고

동물과 같이 욕망만 추구하다 갑니다.


그래서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통하여 자신의 영혼을 결실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과 집착에 한을 얻고 자신의 영혼을 까먹고 갑니다.


사람이 죽으면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남기고 갑니다.

죽으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의식체가 되어

자신과 인연있는 사람 주위를 떠돌게 됩니다.


한이 없는 이는 곧 이승에의 집착을 지우고 

깊은 잠에 빠지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건너가지만


세상에 집착이 많거나 한이 깊으면 죽어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의 집착과 한을 풀기 위해 계속 아는 사람들 주변에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존재들을 유혼이라고 합니다.

유혼이 되면 지옥의 환상과 고통에 헤매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은 항상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생에 있을 때 마음의 평안을 얻은 자만이

저승에 가서도 마음의 평안이 있어 

좋은 차원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아버님의 죽음으로 마음이 비통하겠지만 

이미 인연이 다했으니 모든 인연을 끊고 편히 보내드리기 바랍니다.


조용한 시간에 아버지에게 

살아계신 듯 옆에계신 듯 마음으로 조용히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저희들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여러가지 마음에 걸리신 일들이 많겠지만

이미 생사가 갈려 이승에서의 인연이 끝났으니 

모든 것을 잊고 떠나셔야 합니다.

저희 자식들은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잘 살겠습니다.

그래야 저희들도 마음 편히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세상에 머물면 지옥의 고통이 온다하니

너무 제사에 신경써지 마시고 떠나시기 바랍니다.

편히 주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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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신이 고통과 불행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은 

신과 동급의 또 다른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뜻이니 신의 유일성이 부정되는 것이며 

전지전능한 신이 만든 사악한 천사가 악을 만들었다면 

그가 배반할 것도, 또 그가 악을 만들 것도 신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니 

그것은 신의 음모성과 비자비성, 그리고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신이 악을 미리 안배해 두었다는 말과 같으니 신의 책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책임은 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고통을 주고 

신의 은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불행을 준다는 것은 

신이 인간을 장난감으로 놓고 희롱하는 것이다. 


세상의 악과 불행과 고통으로 인해 인간들이 처절히 외치는 절규와 고통을 생각한다면 

신의 구원과 은총을 위해 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만들었다는 

관념적인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신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존귀한 인간에게 고통과 불행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이 용납할 수 없는 신의 횡포인 것이다. 

이러한 잔인한 신이라면 믿지 않는 것이 좋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듯이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사랑의 신이라면 

신의 영광을 위해 악과 불행을 주었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이 나오는 이유는 세상 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을 신을 주체로 하여 생각하기에 모든 책임이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물주는 완전한 뜻을 지어 놓았다. 

그 뜻은 각자가 지은대로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신의 책임이 아니라 

각자가 지은대로 받는 이치에 의한 것이다. 

잘못 행한 자는 불행과고통을 받고 잘 지은 자는 완성에 이른다. 

얼마나 완전한 뜻인가?


그리고 영적 생활을 강조하는 한국의 신흥 기독교에서는 

현대인의 죄와 고통과 불행이 불완전한 인간들이 교만하여 

인간위주의 삶을 강조한 결과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즉 인본주의가 오늘날 전쟁과 지구 파괴와 같은 치명적 위협을 주고 말세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니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흥하게 하시는 분도 신이요 망하게 하시는 분도 신이니 

인간에게 의지하지 말고 신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격적(人格的)인 신(神)이기에 우리들의 기도를 다 듣고 해결해 주며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하면 저절로 다 풀린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아주 좋은 말처럼 들린다. 

불완전한 인간을 믿지 말고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절대자 하느님을 따르면 

모든 것이 바르게 해결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 속에 절대자 하느님이 나타나시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거대한 음모를 발견하게 된다. 


높은 차원의 신은 생명의 질서에 의해 인간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차원이 다른 곳은 서로 오고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높은 차원의 신이 탁한 인간세상에 오면 

인간세상의 인력에 이끌려 다시 윤회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세상에 영향력을 행세하며 돌아다니는 신들은 

인간세상에 대한 한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하급신들인 것이다. 


그래서 현재 하느님을 만나거나 그 뜻을 전해들은 자는 없다. 

그분이 인간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알지도 못한다. 

다만 기도를 통해 계시를 통해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고 믿는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부처님은 잘 표현해 주셨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오늘날 유일신교와 같이 

이 세상을 창조한 브라만을 섬기는 힌두교의 전신인 종파가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한 브라만을 섬기는 자들이 

모든 것을 브라만이 다해 준다는 말을 하는 것이 진실인가에 대해 물음을 받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 중 어느 한사람이라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또는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스승의 스승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고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또는 그 스승들 중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어느 한 사람이라고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부처님은 이처럼 브라만을 믿는 브라흐민들에게 “신을 본적이 있는가?”하고 물어 본다. 

그러자 누구하나 신을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도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신은 본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역시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 중에 어느 누구도, 또한 그들의 스승들 중 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의 스승들 중 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들 중 7대를 거슬러 올라가 

어느 누구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면서 신과 합일하는 범아일여의 가르침을 주장하지만, 

이것은 고대로부터 전승한 내용을 앵무새처럼 암송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 터무니 없는 일이다’ 

이는 마치 알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여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어리석고 공허한 일인 것이다. 


지금 이러한 모순이 현 기독교의 영적 신앙의 근본적 문제점이다. 

신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신에게 의지하면 

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선교하고 이를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좋은 말 같지만 여기에는 생명의 세계를 지배하려는 사후 영적세계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있다. 


만약 그들이 갈망하는 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영이라면 

인간세상은 죽은 영에게 스스로 몸을 바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신본주의의 근본적인 위험성과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신과 교회에 바쳐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좋아지는 것은 떠도는 영들과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본주의를 주장하는 우리나라 신흥 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으니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에는 욕망이 넘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확천금의 비법과 영이 넘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욕심많은 중생들이 몰려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기있는 곳은 먼저 의심을 해야 한다. 

그러한 곳에는 평범하지만 바른 가르침보다는 

정상적 사고와 진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이치에 맞지 않는 유혹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을 바로 알면 악과 고통과 불행이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부처님의 기본적인 밝힘이다. 


물론 생명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힘이 든다. 

그러나 생명체는 활동을 통해 힘과 생명력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느끼는 삶의 무게는 살아가는 증거이며 삶의 바탕이라 생각하고 이겨내야 한다. 

현실을 열심히 살면 삶의 의미와 보람이 생기고 생명력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이치대로 살면 힘은 들지만 어둠과 불행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치를 어기게 되면 어둠과 불행이 온다. 

즉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무지에서 어둠과 악과 불행이 시작되며 

이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 한계 즉 정신이 흐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여린 진기에서 시작하여 

점차 완전한 진기로 열매를 맺는 과정 속에 들어있다. 

따라서 완전한 영혼을 얻기까지는 그 의식이 흐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계로 

세상을 제대로 축복하지 못하고 업을 짓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깨우침을 얻으면 

그 정신이 맑아져 세상을 바로 보게 되어 좋은 원인을 짓게 되고 

좋은 원인이 쌓여 공덕이 커지고 좋은 운명을 얻어 세상의 열매로 나아간다. 


그러나 나쁜 인연을 만나 나쁜 원인을 지으면 

그 정신이 흐려져 더 큰 업을 짓게 되고 악에 빠지며 

그 근본이 망해 결국 고귀한 생명의 씨앗마저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알고 바로 행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며 

어두운 인연으로 마음이 흐리고 바로 알지 못해 

나쁜 원인을 지으면 고통과 불행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고통이나 불행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죽음이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불가피한 섭리이다. 

즉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는 것이며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조물주는 이 세상을 완전한 법칙에 의해 영원히 존재하게 하였으니 

완전한 인과의 법칙과 순환의 질서에 의해 영원히 계속 돌게 한다. 


즉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고 죽는 과정을 통해 끝없이 자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순환을 통해 자기를 보존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지구도 태양도 우주도 순환을 통해 존재한다. 

생명은 나고 죽기를 반복하고 

지구는 변화기를 통해 지구가 뒤집어지는 과정을 통해 다시 재생되며 

태양도 핵융합을 통해 끝없이 계속 자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그 기운이 다하면 다시 순환을 통해 자신을 나게 되고 

자신의 기운을 보충하거나 더 좋은 자신을 만들어내는데 

죽음이란 그러한 거대한 순환질서의 한 부분인 것이다. 


성자들은 생명과 영혼이 돌고 있는 거대한 생명의 질서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영원힌 생명의 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도 꺼리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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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어김없이 오고 또 다시 정월 초하루가 코앞에 다가와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될 것이다.

인륜을 중시하는 유교전통에 의해 우리 민족이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은 세계 제일인 듯 하다. 명절날 고향으로 밀려가는 인파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며 봉분을 비롯한 제사 등 장례문화는 엄중한 격식아래 큰 부담과 정성을 들여 이루어져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인륜을 공경하는 유교속에 숨어있는 어둠으로 인해 조상을 공경하고자 하는 제사(차례)가 조상을 복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제사속에 깃들어 있는 숨은 비밀들을 밝혀 내여 세상사람들의 삶을 밝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논어 선진편에 보면 제자가 공자에게 영혼 섬기는 법(제사)에 대해 묻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대해 공자는 『산자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영혼을 섬길 수 있느냐?』하고 우회적으로 대답하였고 또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삶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하고 반어적으로 대답하였다.

그는 단지 산자를 대하듯 망자에게 대해서도 정성스레 공경하는 것이 仁을 지닌 인간의 바른도리라고 하여 인간적이며 현실적인 시각으로 삶의 길에 접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망자를 바로 물건으로 취급해 내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너무 슬픔에 잠겨 몇 달이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아니하고 같이 지내는 경우 등이 있어서 공자와 같은 지혜있는 자가 산자와 죽은자와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 공자의 장례에 대한 의견제시가 있었고 제사의 형식도 그러한 인간적인 입장에서 정립되었던 것이다. 공자는 제사에 대해 그속에 숨은 비밀을 알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게 된다고 이야기하였으나 스스로는 제사의 비밀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유교가 제사를 중시하고 있는 종교이면서 제사의 의미와 비밀에 대해서는 깊이있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바로 종교로서의 유교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성자의 깨달음에 의해 우주의 실상과 생명의 이치에 대한 분명한 고찰이 있는 불교와 기독교에서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있었고 인간의 올바른 삶의 길에 대한 가르침도 제시되고 있다.

생명의 길은 모두 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후의 세상과 영적 현상을 알게 되면 제사의 의미도 알게 되고 참다운 제사의 방법과 효과에 대해서도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런 견지에서 제사의 진실에 대해 아는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식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사는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위로연이며 크게 말하자면 죽은 영혼의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산자의 살풀이인 것이다.

생명의 이치에서 볼 때 죽은자는 이승을 떠나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모든 생명은 이생을 다하면 더 나은 후생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저승으로 떠나가도록 해야지 인연이 끝난 이생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러나 요즘같은 어두운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과 집착에 짓눌려 살기 때문에 한과 미련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죽은 뒤에도 평안하게 윤회하지 못하고 이승에서 계속 떠도는 유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올바른 삶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은 자는 죽는 즉시 깊은 잠에 빠져 윤회에 들거나 높은 신계로 올라가게 되므로 이승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된다. 부처와 예수가 제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에는 바로 이런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숨은 진실을 모르고 단순한 현실적 효용과 인간적 논리에 의해서 생의 윤리를 전개한 유교에서는 죽은 자도 산자와 같이 공경하는 입장에서 제사를 지니게 되었고 그것이 점차 형식적으로 전개되어, 산자는 제사에 짓눌리고 죽은자는 불행속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빛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제사가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생활방식이 됨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명과 영혼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제사가 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이 됨으로서 죽은 자들은 이승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망자에게 제사를 지냈듯이 후손들의 곁에 머물면서 제사를 받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명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며 영혼 그 자신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영혼이 이승에 머무는 것이 단순한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영혼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불행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영혼들은 이미 몸을 가지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승의 환경이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오게 된다. 몸의 보호막이 없는 영혼들은 무제한의 의식의 자유속에 있기 때문에 그 불안한 의식체들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의해 무제한의 환상과 고통을 받게 되며 또한 유계의 나름대로의 존재양식에 의해 갖가지 불안과 공포가 형상화되어 괴물과 공포와 고통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옥도라고 하는 것으로 지옥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들이 이승속에서 겪게 되는 영적환상인 것이다. 그결과 지옥의 고통에 시달린 영혼들은 피폐하고 고갈되어 좋은 후생을 결코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들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행한 후생의 길로 가는 것은 진리를 찾지 아니하고 인간이 만든 무지와 관습에 따라 함부로 인생을 살아온 어리석은 중생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제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제사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억울하거나 한을 가진 사람들을 달래 주는데는 매우 요긴한 방법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어둡고 한이 많고 고통스런 세상에서는 더욱 제사가 필요하며 우리나라와 같이 제사를 삶의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관습이 있는 민족에게는 더 더욱 그러하다. 일단 이승을 떠도는 유혼이 된 영혼에게는 제사만큼 위안이 되는 것이 없다. 떠도는 유혼에게 제사를 지내면 고달팠던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위안을 얻고 자신의 삶을 돌아 볼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영혼들은 과거 자신이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으면 그 음식을 의식으로 접하는 것으로 먹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신이나 영혼들은 의식만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생존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제사는 좋은 음식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며 그들이 좋은 후생을 맞이하도록 바른 영혼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있어서 전해져 내려오는 관습 중 하나가 제사가 끝나면 지방을 불사르는 것인데 만약 불붙은 지방이 허공으로 올라가면 영혼이 감응했다 하여 사람들은 지방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다. 영혼이 응답하는 것보다 응답하지 않는 것이 영혼에게 좋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응답한다는 것은 곧 그 영혼이 이승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는 증거이며 고통속을 헤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사가 생명의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경우 그 이치를 모르는 영혼들은 매우 섭섭해 하며 산자에게 악감을 품고 이상한 현상을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 갑자기 제사를 치우면 안되며 마치 산자에게 이야기 하듯이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제사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생명의 길을 일러주고 일정한 기간을 두면서 점차 줄이겠다.고 말하고 제사를 점차 줄여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나쁜영과의 접촉이 있을 때 활용해도 된다. 영과의 접촉에 의해 집안에 우환이 생길 경우 영을 생각하면서 정성껏 젯상을 보아 이웃을 부르는 듯한 마음으로 영을 초빙하여 영이 오해하고 있는 일을 해명하고 생명의 길에 대해 말해 주어 더 이상 구천에 헤메지 않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리하여 영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면 자기 마음속에 그러한 느낌이 오게 되어 있다. 이리하여 영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면 제사가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는 작은 영적 오해에서 비롯된 일들을 처리하는 것에만 효과있는 것으로 삶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거나 깊은 원한을 품은 영혼들을 달랠 수는 없다. 철천지 원수로 깊은 한을 품고 있는 원귀들은 달랜다고 해서 한을 풀지 않을 것이며 잘못된 삶으로 인해 영혼이 망쳐져 버린 유혼들을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좋은 후생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평소에 좋은 삶으로 자신의 영혼을 가꾸어야 하며 남에게 한을 짓지 않도록 하고 스스로도 한을 품지 않도록 하여 마음을 맑고 가벼이 지니는 지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므로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유교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죽은 자는 신의 곁으로 가고자 의식하기 때문에 이승에 대한 집착을 보다 쉽게 잊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에도 잘못된 가르침이 번져 이승을 떠도는 영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광신적인 믿음에 의해 죽어서도 기독교를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집착과 예수재림과 함께 이루어 진다는 부활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교리 때문이다. 이러한 교리는 예수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제자들이 자기의 생각대로 지어낸 논리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영향은 너무 커서 오늘날 교회에 가면 이세상에서 부활하고자 하는 욕심을 지닌 영혼들이 계속 교회당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가 재림하여 자신을 육신 그대로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기독교를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집착에 맺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기이한 심령현상 등을 일으키며 헤메고 있는 영혼들을 많이 볼수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관념의 노예짓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죽은자는 이생에서 할 일을 다했으니 다음생을 기다리는, 오고 가는 우주의 진리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현상에 대한 고찰이 가장 깊은 불교에서도 같은 취지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으나 이종교 또한 부처님의 정법이 아닌 인간적인 욕망에 의해 변질된 교리가 세상을 병들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천도제를 통해 영혼을 구원한다는 행위와 "나무관세음보살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이다. 삶의 길은 엄연한 우주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평소 그사람이 살았던 행위의 결과가 그마음에 쌓여 영혼이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 이외에 그사람의 업보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설혹 신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바꿀 수가 없다. 만약 기도나 제사를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면 농사를 짓지 않고도 기도만 하면 풍년을 들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세상에 그런일이 벌어진다면 하루 아침에 세상은 망하고 말 것이다. 만약 천도제를 지내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돈많고 권력있는 자들은 모두 천당을 갈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절이나 교회에 헌금이나 시주를 많이 하고 좋은 장례에 멋있는 굿을 한다면 모두 천당에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변의 엄중한 진리가 지배하는 이법의 세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장례를 화장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매우 좋은 방법이다. 화장을 통해 이승속에 자신이 머물곳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영혼에게 있어서 빨리 이승을 포기하고 후생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즘 일어나고 있는 화장장려운동은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정신을 맑고 가벼이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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