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운명 본문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 자기 몫이 아님을 깨닫고 운명인양 체념하고 산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있는가에 대해 매우 궁금해 한다.
과연 세상에 운명이란 존재하는 것이며 그 운명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운명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거대한 산처럼 우리들의 앞을 짓누르고 있는 운명의 모습에 질려
그 실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명이란 한마디로 참외씨를 심으면 참외가 나고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가 나는 것과 같다.
운명이란 바로 자기 속에 지어진 근본바탕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고 과거의 일을 되풀이한다. 이것이 만물의 공통된 존재법칙이다.
콩은 콩의 인과를 돌고 팥은 팥의 인과를 돈다. 쪽파가 대파가 되는 일이 없으며 호박이 수박이 되는 경우가 없다.
모든 것은 과거에 지어진 속성이 되풀이 되고 있으니
인간도 전생에 자신의 삶속에 있었던 자질과 품성이 다시 나타나 운명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학문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현대사회는 윤회와 전생을 부정하며
인간의 운명은 부모에게서 받은 육체의 유전자나 현생의 교육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육체만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그 자체의 질서에 의해 별개로 순환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은 전생의 성품과 자질과 능력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받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모두 다른 이유는
환경과 교육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생에 살아온 각자의 모습이 달랐던 것이 주된 원인인 것이다.
콩농사를 지을 때 환경이 좋으면 잎이 크고 수확량이 많아질 수 있지만
노랑콩이 검정콩이 되는 경우는 없다.
환경과 타고난 근본이 인간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력의 차이도 이와 같은 것으로
환경이 전생의 결과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와 후생에 좋은 운명을 가지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을 통해 좋은 품성과 훌륭한 능력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구철학에서 근대 인식론의 개창자인 존 로크는 ‘인간오성론’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에는 백지상태지만 경험을 통하여
백지상태인 마음이 물들어 관념을 형성한다고 했다.
즉 인간의 인식은 감각과 반성이라는 두 가지 경험에서 생기며
이 경험은 단순관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복잡한 관념이라도 근본적으로 단순관념으로 분해되므로
자아의 실체는 없으며 그때 그때의 감각이나 감정을 합한 총체가 자아이므로
인간의 의식은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대륙의 합리론은 인간이성의 합리성을 주장하고
인간의 타고난 이성에 의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합리론의 창시자인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이성적으로 확실한 것에서부터 확실한 것으로 자꾸 추리해 나가면
결국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기치로
생각하는 나를 정신이라 부르고, 이를 항상적 실체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의 완전성에 기초한 이 이론은
왜 똑같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에 따라 성격과 능력이 차이나고
운명이 왜 다른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철학사조에서 이 두가지 이론은 큰 족적을 기록했지만
진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이론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단순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그들은 실상을 보지 못했기에 단순히 생각과 논리만으로 이러한 이론을 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와 인식능력에 대해 깊이있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동양에서는
인간내면에 대한 사실적인 성찰을 통해
윤회와 업의 이치로 이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모든 업을 털어버리고 완전한 시각을 얻은 부처님은
모든 생명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반야의 경지를 체험하고
인간의 업과 인식능력이 생과 사를 거쳐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운명에 작용하고 있는지 명백히 밝혔다.
즉 인간의 영혼은 윤회를 통해 후생의 근본이 되고
전생에 지은 공덕과 업은 영혼을 통해 후생에 이어지는 것이니
전생에 좋은 품성과 선근을 지은 사람은
후생에서도 큰일을 하며 완성으로 나아가고
사사로운 욕망에 집착해 그릇된 행동을 일삼은 이는
그 마음이 어둡고 욕망이 가득해 지옥의 업과 소멸의 과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인식능력은 완전하거나 모두 같지 아니하며
각자가 지닌 전생의 업에 따라 다 다르다.
여기에 경험론과 합리론의 궁극적인 합일점으로서
실천을 통해 인간정신을 완성시켜 나가야 하는 생생한 삶의 길이 나타난다.
현대과학은 인간정신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의식은 육체를 구성하는 유기체의 화학반응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유기화합물과 염기서열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식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과학자들의 말처럼 인간의 의식이 유기물의 화학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똑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진 유기물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의식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유기물의 화학작용이 아닌
또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과학자들은 우주의 근원은 물질이며
원시대기의 고압상태에서 방전이 일어나 우연히 유기체가 생겨났고
이것이 진화하여 생명체가 되고 그 화학반응으로 의식작용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비과학적인 논리이다.
이 우주의 근원에 오직 물질 밖에 없다면 영원히 물질만 나타나야 하고
의식이라는 현상이 나타나서는 안된다.
이것은 인과의 법칙상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에 생명체가 생겨나 있다는 것은
이 우주의 근원에 의식의 씨앗이 근원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끝없이 돌고 도는 우주의 순환 속에
언젠가는 의식을 지닌 생명체가 나타나게 되어 있어서
생명의 질서와 신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죽으면 다양한 무기물, 유기물과 함께
의식의 결과인 영혼도 남아 여러 가지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진실은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다.
경험에 의한 것이든 논리에 의한 것이든
영혼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또 존재한다.
그래서 영혼 자체의 결과에 의해 사후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이를 받아 새로 태어나는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에 올라가 현생에서 한 일을 심판받으며
새로 태어나는 생명은 모두 하느님이 혼을 불어넣어 새 생명을 창조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이 모든 존재가 하는 일을 다 기억하여 심판할 수 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만들 수 있겠는가?
이러한 모든 존재들은 하느님이 일일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의 힘에 의해 자율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이며
각 주체들이 행한 일들은 자연이 정해놓은 법칙에 의해 자율적으로 심판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모든 영혼을 심판한다면
지구상에 가득찬 모든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일일이 기억하는데 너무 힘이 드실 것이다.
어제 밤에는 고요한 가운데 온 세상에 가득 쏟아지는 떡가루 같은 흰눈을 바라보며 그 장엄함과 신비로움에 감동을 받았다. 만약 하느님이 가루를 빻아 온 하늘에 뿌린다면 그 엄청난 수고에 하느님이라도 몸살이 났을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알아 수증기를 올리고 기온을 떨어뜨려 눈을 만들기에 이러한 엄청난 일들이 아주 자연스럽고 쉽게 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심판도 이처럼 자연질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느님이 일일이 관여하지 않는다.
만약 하느님이 모든 영혼을 심판한다면 세상에 나타나 인간을 괴롭히고 있는 많은 악령들을 방치하고 있는데 대한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기독교에서는 악령이란 천사가 죄를 범해 하나님을 배반한 힘있는 존재이므로 하느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죽은 영이 다른 사람에게 붙어 신세를 한탄하며
한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한국적 무속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느님이 사후의 영을 모두 심판한다면
이렇게 유혼이 떠돌아다니며 산자에게 붙어서 괴롭히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에도 죽은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일률적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의해 자율적으로 규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윤회를 부정하고 하나님이 새로 태어나는 자의 혼을 일일이 불어넣어 새 생명을 창조한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으로 나가면 깊은 산골짝 낙엽 속마다 기이한 벌레가 꿈틀대고
수천미터 심해 속에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해양생물이 있으며
작은 먼지덩어리에도 수백만의 세균들이 득실대고 있다.
어찌 하느님이 이 모든 생명을 일일이 창조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는 완전한 뜻과 생명력이 존재하고 있어서 우주역사가 흘러가면 저절로 생명이 생겨나며
환경에 따라 갖가지 생명체가 진화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모든 영혼을 창조한다면
어떤 이는 나면서부터 부귀한 곳에 태어나 뛰어난 자질로 살고
어떤 이는 비천한 곳에 장애를 안고 태어나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기 위해
일부러 시련을 주어 인간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어떤 이에게는 평생동안 호화로운 배역을 맡기며
어떤 이에게는 비천하고 불행한 조연을 맡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두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자랑하는 위대한 역사가 될지 모르지만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불공정하고 억울하며 하나님의 처사가 너무 잔인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모든 것을 인간적 시각에서 완전하게 처리하는 하나님을 상정하다보니
나타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런 결론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은 과거에 지은 원인에 의해 다시 공정하게 나타나고 있다.
흰 백합이 다시 흰 백합이 피고 노랑 수선이 다시 노랑수선을 피우듯이
모든 일은 자신이 지은 업과 자연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이를 결정할 자는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과학은 인간의 영혼이 없으므로 윤회나 전생이란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과학 법칙상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반드시 그 결과를 남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이 결과가 있는데
살아있을 때 세상의 주인이 되고 온 우주를 좌우하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 인간의 마음이
죽음과 동시에 아무 결과도 없이 '펑' 사라질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육체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마음이다.
따라서 육체가 그 재를 남기듯이
살아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많은 활동을 한 위대한 인간의 마음도 반드시 그 결과를 남기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자신이 검증할 수 있는 것만 말해야 한다.
자신들의 인식 범위에서 벗어나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고 해야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영혼이 바로 그러한 영역에 속한다.
과학자들의 평범한 감각능력으로는 기와 영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기와 영의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업이 사라진 맑은 마음을 얻거나 명상으로 몸이 열리거나 영적 접촉이 있어야 한다.
즉 앞이 보이지 않으면 안경을 쓰야지 자신이 볼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한다고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고
여러 가지 심령현상을 일종의 집단최면이나 심리현상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 나타나는 여러 심령현상들은 집단최면이나 심리현상으로 일반화시키기에는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전기적으로 측정이 안되는 기가 몸에 물처럼 흐르는 현상!
당사자가 전혀 듣지도 배우지도 않았던 말로 방언하는 현상!
신이 들려 다른 사람의 혼을 받아 그 혼이 과거에 살았던 구체적인 일들을 표현하고 목소리를 흉내내는 현상!
다른 영이 몸에 들어와 산사람처럼 대화를 나누며 괴롭히는 현상!
영매가 날이 선 작두 위를 뛴다거나 불위를 걷는 현상 등!
이러한 현상을 학자들은 모두 환상이나 정신착란, 집단최면으로 간주하거나, 정 해석이 곤란하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이 야기하는 현상이라고 말하지만
조금만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면
실재하는 제3의 의식체인 영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실을 부정하게 되면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그만큼 부정확해지며 삶이 부실해지는 것이다.
그 예로 현대사회에는 삶이 어지러운 관계로 많은 정신병이 나타나고 있는데
오늘날 정신병학계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든 병인을 의식 미발달, 환경 부적응,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 등 심리적인 요인으로 분석하고 있어
치료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격리 치료로 2차 문제를 예방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세계를 보게 되면
심리적 충격이나 뇌의 이상으로 오는 정신박약 이외에
대부분의 정신병은 다른 유혼들이 깃들어 나타나는 현상인 만큼
이를 쫓아내야 비로소 근본적인 치료가 된다.
이처럼 영혼은 우리의 삶에 본질적인 것이니
이를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고 보아야만
세상이 제대로 해석되고 삶이 순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실제 사람이 죽어 영혼이 나타나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살펴보자.
이러한 비밀은 수천년 동안 사람들의 상상과 환상적인 글 속에 남아있었지만
이곳은 수천년만에 생명의 진실을 밝히는 곳이니만큼 그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사람이 죽으면 가슴(명치부근) 속에 들어있는 인간의 영혼이 아뜩한 기분이 들면서 몸 밖으로 빠져 나온다. 이때 영혼은 자신의 죽은 몸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동안 자신이 영혼을 부정했던 것이 얼마나 무지했던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가족과 친지, 이웃들이 자신의 죽은 몸에 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그들과 말을 하려고 시도해 보지만 그들은 자신을 전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노곤한 상태로 잠에 빠지게 된다.
이때 영혼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반야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모든 기억을 잊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는 반야심경에 잘 표현되어 있다.
즉 이 경지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지이기에 살아있는 자는 업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으며 죽은 자는 기억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좋은 삶으로 과거를 잊고 편히 잠들 수 있는 자만이 반야의 경계를 거쳐 새로 윤회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현실에 대한 한과 집착에 붙들려있는 영혼은 결코 자신을 놓을 수 없기에 계속 과거의 자신으로 남아 이승을 떠돌기 때문이다.
즉 떠도는 유혼은 현실에 대한 원한과 집착이 커
계속 현실의 인연을 부여잡고 깨어있게 되므로
반야에서 편히 잠들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죽은 영혼은 몸이 없기 때문에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현실의 환경이 온갖 환상을 일으키게 된다.
즉 몸의 보호막이 없는 영혼들은 무제한적인 의식의 자유 속에 있기 때문에
불안한 의식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업이 만들어내는 무제한적인 환상과 공포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기압의 변화에 창칼 지옥의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되고
뜨거운 태양과 겨울의 추위에는 화탕지옥과 한냉지옥을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계 나름대로의 존재양식이 있어
갖가지 불안과 공포가 형상화된 괴물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것은 유계 자체의 독특한 존재양식으로 영들은 실제와 마찬가지로 느끼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이 죽은 영혼이 세상을 떠돌다 의식으로 느끼는 환상이 바로 지옥으로
지옥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계를 떠도는 영혼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영적 고통인 것이다.
이러한 고통에 시달린 영혼은 점차 그 기운이 쇠하고 메말라 흩어지게 되는데
그래서 삶을 잘못 산 영혼은 자신의 근본조차 간직하지 못하고 미물의 세계에 빠지거나 윤회의 굴레에서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영혼은 생명의 질서 속에 계속 돌고 있기 때문에
죽으면 그만이라고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며
한순간이라도 정성을 다해 하늘의 뜻과 이치에 따라 살도록 노력해 자신의 근본을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윤회와 운명의 실상이 이러한데 동양에서는 인간의 운명이 사주팔자에 의해 좌우된다는 관념이 있어왔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모든 것을 수리로 풀이하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삶은 추상적인 수가 아니라 인간의 생생한 감정과 생명력이 숨쉬는 현실인 것이다.
사주팔자는 동양의 주역에서 비롯되는데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이 있고 이를 1에서 10의 숫자로 구분하여 인간 세상을 해석하는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의 성품과 성장과정과 가정과 주위환경을 모두 숫자로 변환해
이를 산술적으로 정확히 계산한다면 운명도 정확히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어 명확히 숫자로 나눌 수가 없을뿐더러
인간의 이해력이 부족하여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다.
따라서 수리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지만
생생한 현실을 모두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사주론이 정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생년일시가 인간의 자질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질은 검정콩이 검정콩의 원인을 물려받고
노랑콩이 노랑콩의 원인을 물려받듯이
인간 또한 전생의 자질을 물려받는 것이지
태어난 일시가 자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콩을 4월에 뿌렸던 5월에 뿌렸던지 간에 그 유전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물건이나 제품을 사용할 때에도
그것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어떤 이름이 붙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 재료가 무엇으로 이루어졌고 그 기능이 어떠한가에 의해 제품의 성능이 결정되는 것이다.
사주가 그러한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태어난 일시나 이름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타고난 자질과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만에 하나 수리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가정하더라도
운명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수리적 경향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알아야
이를 잘 조합하여 그 사람을 운명을 맞출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사주가가 이것을 정확히 볼 줄 모른다면
아무리 사주이론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운명을 맞출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의 사주팔자는 사주가의 능력과 경험에 따라
백인백색으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아무리 완벽한 사주법이 있어도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현실에 정확히 적용할 수가 없으며
그렇다면 완전한 눈과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정확히 운명을 볼 수 없다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완전한 시각과 능력을 가진 성자가 나타나시면
그분은 인간의 운명을 사주로 풀 것인가?
아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다.
왜냐하면 사주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자들은 자신이 본 우주의 실상과 진리, 세상의 운명에 대해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쉽게 표현할 것이지,
생생한 삶이 빠진 추상적인 수리로 인생과 우주를 도식화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사주팔자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삶의 생생한 모습 대신에
개념화된 수리만으로 운명을 예측하려고 했으니
전제가 잘못된 이론이 운명이라는 사실을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해도 삶의 실체를 볼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영의 힘을 빌리러 산기도를 하러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음침한 곳에서 밤을 새워 많은 밤을 단식기도를 하게 되면
심신이 쇠약해지고 그 틈을 타서 유혼이 침입하여 영의 노예가 되면
그 영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는 소리를 하며 사주를 잘본다고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이 붙게 되면 영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를 이용하여 아는 소리를 하게 되고
이것이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 큰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주를 잘보거나 점을 잘치는 사람들은
대개 영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영들은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른 영과의 연결을 통해 지난 일들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점을 치러가 보면 점쟁이가 전날 있었던 일들을 잘 맞추는 용함을 보인다.
그래서 손님의 마음을 훔쳐보고 "어제 뭘 먹었지? 무슨 일을 했지?" 하고 맞추는 것이다.
그러면 손님들은 "와! 이 사람은 용한 사람이구나!" 하고 감탄하여
무조건 믿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깃든 영들은 모두 헤매는 유혼들이기 때문에 그 한계가 명백하다.
유혼은 욕망과 집착에 의해 이승에 붙들려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 속에 있는 이치는 결코 보지 못한다.
만약 유혼들이 세상의 실체를 보고 바른 이치를 안다면
결코 이세상을 헤매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산자의 몸에 붙어 불행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주가들이나 점장이들은 과거는 정확히 맞추나 미래는 맞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상대의 마음 속에 있었던 기억들을 보거나
논리를 맞추어 말할 수 있으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수많은 요소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신문을 보면 저명한 사주팔자의 대가들이
유명인사들의 팔자를 정확하게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유명인들의 지난 일들은 그럴듯하게 해석하지만
사전에 미리 그 운명을 예언하거나 팔자를 고쳐주는 일은 없다.
이처럼 사후에 결과를 보고 해석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 필요한 것은 사후에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미리 문제와 원인을 밝혀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만약 사주가들이 세상의 이치를 알고
미래의 운명을 바꾸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세상을 구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남의 사주나 봐주며 밥벌이하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과 윤회와 인과의 이치를 깨닫고
좋은 품성과 자질을 길러
자신을 좋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영혼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진실을 정확히 안다면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고 있는 영적 문제에 대한 부작용을 해결하고
혼돈에 빠진 인류문명에 참된 삶의 의미와 질서를 제시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영혼이 죽음과 동시에 '펑'하고 사라진다고 생각하기에
이 생에 있을 동안 마음대로 탐욕하고 끝없이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끝없이 이어지고 영혼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면
한순간도 자신의 삶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끝없는 정성을 다하게 된다.
영혼을 부정하는 현대 지식인들은 인간에게 영혼이란 존재가 없어도
양심이 있기에 이성에 맡기면 모든 것이 저절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 속의 말일 뿐이다.
어두운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흐려진 인간의 양심과 이성은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자신의 이익과 유혹에 따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와 삶의 영원성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문명이 삶의 의미와 목표를 잃고
악과 무질서로 빠져들고 있는 근본원인인 것이다.
따라서 삶의 결과인 영혼이 존재하며
자신이 지은대로 완전히 결과를 받으며
그 업보를 영원히 지고 간다는 영원한 질서를 분명히 확립해야만
인간의 양심은 바로서고 밝은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한알의 밀알이 새 싹이 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을 썩혀야 하듯이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반야의 상태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지워버려야 한다.
만약 과거의 한과 집착에 의해 자신을 버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다면
그는 과거의 자기로 계속 머물게 되어 새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생명현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지우고 새 생명체로 태어남으로
인간은 비록 과거로부터 났다고 하나 완전히 새로운 개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과거의 기억은 갖고 있지 않으나
영혼의 맑기나 성품과 지혜, 기질 등은 과거의 자기를 그대로 물려받게 된다.
마치 우리가 양곡상에서 여러 곳에서 자란 콩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각 품종이 어디에서 난 것인가를 알 수 있으며
씨알을 보고 그것이 좋은 밭에서 난 것인지 햇살과 농부의 정성을 얼마나 잘 받은 것인지 짐작할 수 있듯이 사람의 경우도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지혜와 성품을 보면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떠한 전생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생을 알지 못하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모든 원인이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하고
비록 다음 생에서 현생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수생의 이치를 완전히 꿰뚫어 보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도 한결같이 이러한 이치를 밝혔다.
윤회와 업의 이치를 밝힌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서구 정신계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도 플라톤이 쓴 "파이돈"에서 다음과 같이 잘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전생의 습관에 따라 다시금 메이게 된다. 마구 폭식하거나 제멋대로 산다거나 술에 취해 산 자는 당나귀나 그밖에 탐욕된 동물로 태어나고 부정한 일과 포악한 일, 도적질을 한 사람은 독수리나 매같은 것으로 태어난다. 부지런하고 규칙을 즐기는 이는 개미나 벌과 같이 되고 또 그들로부터 다시 인간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서 쉽게 알 수 있다.
호박이 수박이 되는 경우가 없고 쪽파가 대파가 되는 일이 없듯이
과거 생에 매사에 소극적이고 게으르게 살아간 사람은
후생에서 용기있고 지혜로운 인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정주영이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배운 것이 없어도 대재벌이 되고
대조영이 망국의 유민으로 있다가 발해를 건국한 것도
과거 생에 거상으로서의 기질과 영웅으로서의 풍모가 있었기에
그 정신과 기상이 바탕이 되어 그러한 업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는 인과와 업의 이치이니
후생을 경이롭고 두렵게 생각하고 성실하고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 이것으로 그치거나 과거의 습성에 의해 영원히 맴도는 것이라면 살아갈 필요조차 없다.
인간에게는 신의 속성인 자유성이 있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습을 넘어설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완전성에 도달하려는 밝은 이성이 있어서
조금의 부족함도 용납치 않고 불편해하며 개선하려 한다.
따라서 문제를 느끼면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내고
이를 실천하면 그의 운명은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하늘은 이 세상을 완전한 법계로 만들고
인간에게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으며
지은대로 결과를 받는 영원한 질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뜻을 내어 원인을 지으면 지은만큼 결과를 받는 완전한 세상이 있기에
우리는 주어진 세상을 보람있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인과의 이치란 이처럼 어떤 원인이 새로운 원인을 만남으로서 거기에서 새로운 결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부처나 예수와 같은 성자들이 불경과 성경을 말하기 전부터 있어온 우주의 기본원리이며 본래 모습이다.
성자들은 이와 같이 사실 속에 존재하는 불변의 이치와 진실을 발견하고 이것을 세상에 가르치신 것이다.
운명도 이와 같은 인과의 이치 속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인과의 법칙 속에서
현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원인을 지으면 된다.
호박은 호박을 낳고 수박은 수박을 낳지만
호박줄기를 끊고 그곳에 수박을 접붙이면 수박이 열리는 것이 인과의 이치인 것이다.
즉 아무리 자신이 호박의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자신의 천성을 과감히 잘라내고 그 자리에 수박순을 접붙이면
수박이 열리는 것이 인과의 이치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아무리 환경이 운명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라도
바른 이치를 알고 좋은 인연을 만나 과감히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좋은 품성과 자질을 얻어 좋은 미래와 후생을 기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운명의 주체로서 자유와 창조라는 신의 속성을 부여받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나타난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운명의 실을 잣고 있는 거미지만
앞으로 어떻게 짤 것인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체적인 거미인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바라는 무늬와 곱기로 베를 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나 자기 마음대로 베를 짤 수 있다면 출세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돈 못버는 사람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불만을 느끼며 바꾸고자 노력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습성을 스스로 벗어나기는 매우 힘이 드는 것이다.
돈 후앙에게 바람기를 버리라고 할 수 없는 일이며
마약에 중독된 자에게 마약을 끊어라고 해서 끊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삶들은 쾌락과 재물과 출세라는 현실의 마약에 중독되어 있어서
진실한 가치와 보람있는 삶을 위해서는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가 없고 그것을 받아들일 양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호박같은 습성을 계속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평생 운명이라는 굴레를 천형처럼 지니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서 좋은 인연을 만나야 하며
세상의 이치와 올바른 삶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고
참된 삶과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바른 길이 있어도 알아볼 수가 없으며
구태여 좋은 길 바른 길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원전 성자들이 나타난 이후
수천년간 수많은 구도자들이 황야를 헤맸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쓰러져 간 것은
그들에게 참된 진리의 빛와 분명한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부처님 재세시에 제자들이 모두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던 것은
깨달음의 실체와 명확한 길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기 때문이다.
분명한 진리와 인간의 길을 본다면
더 이상 헤매임은 없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발전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인연을 만나 명확한 진리의 길이 존재함을 깨닫고
자신의 호박같은 천성을 과감히 버리고
맑고 좋은 근본을 선택하면
삶이 좋아지며 세상을 축복하는 원인을 짓게 된다.
세상일은 이치에 의해 꾸며지며 진리에 의해 유지된다.
인간의 운명도 이런 법칙에 적용되어 자신이 지은 것에 따라 화와 복이 결정되는 것이다.
즉 사람은 자기 스스로 더 좋은 자신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고정된 운명 속에 머물게 되며
자신의 잘못을 밝혀 더 좋은 원인을 짓는다면 더 나은 운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이치는 너무나 쉽고 명백하다.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고,
이름을 떨치려면 자기 자신을 가꾸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며,
세상을 위해 보람있는 삶을 살려면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길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법칙 앞에서는 어떠한 사술도 용납되지 않으며
점과 사주, 성명학이나 기도, 심지어 신의 축복 또한 통하지 않는다.
신도 자기생각대로 세상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사실 속에 존재하는 일과 이치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 주변에 존재하는 사실과 이치에 대해 바로 앎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운명을 누리지 못하고
사실 속에 존재하는 문제를 정확히 보지 못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할 원인을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일이며 인간의 운명속에 숨겨져 있는
너무나 쉬우면서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는 비밀인 것이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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