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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과 욕망의 차이 본문

☆ 사실,이치 나눔글

소망과 욕망의 차이

gincil 2016. 6. 4. 22:52

이 우주가 미망에 의해 생겨난 환상에 불과하며

무엇을 짓는다는 것이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뜻을 세워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을 일종의 집착이며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움직여 무엇을 짓고자 함이니

삶을 살아가면서 좋은 뜻을 품고 이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방식이며 존재이유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태어나는 생존 자체를 무의미하게 생각하고

세상살이를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고통의 바다에 떠밀려 내려온 것으로 생각한다면

더 이상 진리를 구하거나 삶을 궁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다.

그들에게는 무엇을 하던 이 세상 속에는 아무런 의미도 길도 없고 살아볼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지은대로 받는 인과법이 이 세상에 완전하게 펼쳐져 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좋은 원인을 지으면 좋은 결과가 있으며

나쁜 뜻을 지으면 불행이 오는 완전한 세상이 우리에게 던져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이샬리의 황혼을 바라보며

‘이 세상은 참 아름답고 살만하다!’ 고 하시면서

‘바른 이치를 깨닫고 열심히 좋은 원인을 지어 해탈에 이르라’고 하셨던 것이며

모든 부처의 공통된 가르침인 칠불통계에도 ‘모든 악을 멀리하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염세적으로 보고 모든 행위를 업과 고로 보는 것은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법이 흐르고 있는 완전한 이 세상을 정확히 설명하는 정법이 아닌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자면 인간이 반드시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겨나게 된다. 직장도 잡아야 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출세도 해야 하고 깨달음도 얻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모든 일들은 의욕하지 않고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관념화된 불교가 사실과 다르게 어떠한 집착을 내어서도 안된다고 하니 불교인들은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소망조차도 품을 수 없어 현실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없고 항상 엉거주춤한 자세로 살게되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인들은 냉엄한 생존현실에서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다른 경쟁자들을 이겨낼 수가 없어 항상 패배자가 많고 염세론자가 많아 현실 속에 불교의 위상은 날로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법이 실상법이고 인과의 이치를 밝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법이라면 현실이 이렇게 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일이다. 이렇게 된데에는 실상을 공이라 여기는 관념적인 불교가 들어와 사실과 이치를 중시하는 부처님의 실상법과 인과법을 파괴한 영향이 크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불교는 고의 원인을 집착으로 파악하여 세상 사람들이 유한한 재물과 욕망에 집착하여 고통에 빠진다고 보고 선업 또한 하나의 집착이므로 여기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누누이 말씀하셨듯이 집착이 고의 원인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모르고 잘못된 욕망으로 나아가는 무명이 바로 고의 원인인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의 올바른 바램을 부정한 적이 없다.

초기 경전의 대부분의 내용이 인간의 좋은 마음과 선업에 대한 가르침으로

항상 바른 가르침을 찾고 실천하여 공덕을 쌓고 해탈에 이르도록 노력하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좋은 뜻을 내어 인간의 길을 찾고 계율을 지키며

영원한 열반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길이며 바람직한 소망인 것이다.


인간이 짓는 뜻에는 두가지가 있으니

소망은 모든 일을 이치에 맞게 추진하여 바람직한 목적과 좋은 자기를 이루는 것이고,

욕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헛된 목적을 추구하여 자기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소망은 모든 것이 순리에 맞기 때문에 그에 따를수록 삶이 좋아지고 심신이 무르익지만

욕망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그에 집착할수록 거짓이 생기고 마음이 병들어 자신과 세상을 망치게 된다.

즉 바른 이치에 따라 좋은 원인을 지어 자신과 세상을 축복할 할 때는 소망이 되고 선업이 되는 것이며

이치를 어기고 넘어서서 소망이 욕망이 될 때 그것은 무명이 되어 고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소망을 안고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 정법과 인연이 있어 실상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계라 하셨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과법에 의해 완전한 법계 속에 나타나고 있으니 현실을 바로 보고 인과법을 깨치면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우주의 실상과 인과의 이치, 인간의 길을 바로 알아

욕망을 소망으로 바꾸고 한을 축복으로 바꾸면 한과 어둠이 없는 밝고 건강한 세상과 인간완성의 길이 열리게 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소망과 욕망의 차이는 그 뜻과 이치에 의해 결정된다.

같은 일이라도 바른 이치대로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나를 만들고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자와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을 품는 것은 소망이 된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와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크게 한번 호령해 보겠다는 것은 욕망이 되어 자신과 세상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상의 이치를 정확히 알면 욕망과 소망의 관계에서 헷갈리는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돈을 버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오늘날 불자들은 돈을 버는 것을 욕망을 내는 더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인간이 돈을 벌지 않고 어떻게 자신을 유지하며 인간의 도리를 다한단 말인가?


인간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것이 태어난 이유이며 살아가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노력한 만큼 벌고 거짓없이 청정한 재산을 모으는 것은

자신의 삶을 안정되게 하고 행복을 가져오며 마음의 맑음과 지혜를 가져온다.

이것은 소망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돈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거짓을 행하고 남을 사기쳐 재물을 모은다면

그 마음이 어둡고 불안하게 되어 고통과 불행이 따르게 되고 업이 쌓여 한과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일이라도 좋은 뜻을 품고 바른 이치에 따라 노력할 때

인간의 뜻과 마음이 영글게 되며 이고득락을 이루어 최종적으로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게 되며 나쁜 뜻을 품고 이치에 어긋나게 과욕을 부리면 그 마음에 한과 집착이 생겨 업이 두터워짐으로써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바램이나 집착이라도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니 욕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실상을 보느냐 못보느냐 하는 정법과 말법의 차이가 있다.

말법은 논리와 관념에 빠져 사실 속에 있는 진실과 이치를 보지 못하고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말만 하니 오히려 세상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법인 실상법은 사실을 기초로 정확한 인과관계를 밝힘으로써 그동안 불교가 관념에 빠져 혼동했던 선업과 악업, 소망과 욕망, 인간의 집착과 의지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한 길을 제시하게 된다.


그럼 오늘날 많은 불자들이 의문을 갖고 있는 깨달음과 좋은 세상을 위해 애태우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세상이 무상하고 고이며 선업도 집착이라는 잘못된 관념에 빠진 불자들은 깨닫고자 하는 의지와 세상을 위해 애태우는 것도 집착이며 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관념에 빠져 세상을 사랑하고 자비하며 깨닫고자 하는 좋은 마음마저 버려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삶의 주체는 자신이니 의욕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세상을 사랑하고 인간완성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근본으로 이를 키워 인간완성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이 세상에는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지경이 있으니

불제자들은 모두 열심히 노력해 깨달음에 이르라고 분명히 삶의 목적을 제시하신 바 있는 것이다.

그럼 왜 해탈을 위한 마음을 내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자비심을 내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완전한 법계 속에는 완전한 뜻과 질서가 있어

인간에게 세상을 이치대로 보는 맑은 마음과 중생을 자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었고

그 마음을 열심히 키우면 인간완성인 해탈에 이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래 정해져있는 자연법인 것이며 부처님은 바로 이와 같이 우주 속에 정해진 실상의 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즉 부처님이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은 나는 이러한 자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밝혀 설명했을 뿐이지 내가 만들어서 한 말은 한마디도 없다는 뜻인 것이다.(그러니 세상이 공이기에 한마디도 한적이 없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초기경전에 많이 나오듯이 부처님이 평생 하신 말씀이 모두 건성으로 하신 말이라는 것은 도저히 성립할 수 있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인 것이다. 오늘날 공불교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당연한 사실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 인간이 타고난 선근을 키우도록 실상을 밝히고 인과법을 전했으며 팔정도로 계율을 지키고 공덕을 행하여 마음을 닦으라 하셨던 것이다.

이 밝고 좋은 마음이 바로 선근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근본이니 거짓없고 탐욕없는 삶을 통해 마음이 맑아지고 실상과 인과법을 깨침으로써 지혜가 열리며 세상에 대한 자비와 공덕의 실천으로 그 양심과 용기가 커져 선근이 영그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선근을 닦지 않고 가만히 앉아 공함만 깨쳐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고자 하는 것과 같으며 씨를 뿌리고 피땀흘려 농사짓지 않고 풍년이 오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그래서 인과법에 따라 차근히 선근을 닦는 팔정도 이외에는 모두 외도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치가 있어 선근을 잘 키우면 마음이 맑아져 해탈을 이루게 되는가?


첫째, 사람의 마음 속에는 숙생의 윤회를 통해 얻은 선근과 악업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과의 이치에 따라 팔정도로 맑음을 더하고 탁함을 제거하면 점차 그 선근이 정화되어 완전한 의식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 이치는 마치 흙탕물을 정화하는 것과 같다. 흐린 흙탕물도 오랜 시간을 맑은 물을 집어 넣으면 점점 맑아져 나중에는 완전히 맑아진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된 탁한 업도 선업을 계속 쌓아나가면 점차 밝아져 나중에는 완전한 맑음을 얻어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길이 바로 부처님이 밝힌 팔정도인 것이다. 실상과 진리를 배우고 부지런히 깨우쳐 세상을 위해 공덕을 쌓으면 점차 좋은 선근을 얻게 되고 이를 근거로 다음 생에는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 생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를 준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공관불교에서는 이러한 엄중한 인과법을 무시하고 업도 인과도 없고 선근도 수행도 필요없다하니 이보다 더 정법을 훼손하는 말이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의 근본가치인 선근 속에 모든 탁한 업을 불살라버리는 공덕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잡다한 세상인연 속에서 희유한 진리의 인연을 만나 선근을 닦다 보면 나중에는 선근 자체의 강한 에너지가 생겨나 불퇴전의 선과를 지니게 된다.


즉 세상을 밝게 하고 축복하겠다는 좋은 마음으로 실상을 깨닫고 공덕을 쌓게 되면 선근에 힘이 생겨 업을 그치고 지워버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어두운 세상에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말법과 싸우다 보면 더욱 더 정법이 드러나 진리화되고, 그들을 정법으로 인도하려는 자비와 안타까움에 진리와 사랑의 불과 에너지가 생겨나 자신의 사사로운 업을 모두 태워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근과 공덕의 힘이니 마음에 업을 태워버리는 불이 일어나지 않으면 결코 마지막 남은 업과 갈애를 지우기 힘들다. 따라서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깨우침과 큰 공덕을 쌓아 자비와 사랑, 양심과 용기, 진실과 맑음의 선근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에서 가장 완전한 열매인 해탈지경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주를 순환하는 모든 윤회종자 중에서 가장 크고 좋은 선근을 이루어야 한다. 부처님도 당신의 깨달음을 나의 선근이 크고 공덕이 세상을 덮을 만하여 전생에 천상에 이르렀다가 비로소 이생에서 해탈에 이르렀다고 하셨으니 그대가 진정 모든 삿됨을 버린 맑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과 진리를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 있는 큰 선근이 있다면 어찌 당장 모든 업을 태워버리고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인가?


지금 당장 그대가 깨닫지 못한 것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모두 바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만큼 그대의 양심과 사랑과 진실과 용기가 약하기 때문이니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과연 자신이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자신의 마음이 진실하여 마음 속에 한점 어둠이 없는지, 마음이 습과 욕망에 얽매지 않아 세상을 이치대로 볼 수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마음이 타야 업이 사라진다고 하니 집착으로 애를 끓이는 경우와 자비심으로 애를 태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이 탐욕과 집착으로 속이 부글 부글 끓이게 되면 속이 상하고 몸과 마음이 아프고 욕심과 집착으로 업이 더욱 두터워진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자비와 진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거짓과 부딪혀 애를 태우게 되면 마음이 아련히 풀리며 쌓여있는 업이 진리와 사랑의 불에 타버려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욕망과 소망의 차이인 것이다.


이런 이치가 있기에 모든 성자들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쳤던 것이며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80평생을 맨발로 인도전역을 다니며 고생스런 전법을 했던 것이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법을 들으러 온 중생을 위해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 법이라면 딱딱한 교리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면에 있는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끝없는 자비심과 거짓없는 성실함, 꺽이지 않는 용기와 같은 덕목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에 대한 의욕도 부처님처럼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는 자비심에서 뜻을 내면 업이 타 인간완성으로 나아가지만 전지전능한 초능력을 이루어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모든 원하는 것을 다 얻겠다는 탐욕을 내면 그것은 업이 되어 결국 귀신의 밥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모든 업과 탐진치를 극복하여 한점 흐림없는 완전한 맑음을 이루는 것인데 초능력과 명예와 권력과 소유를 탐하게 되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워지고 혼탁해지기 때문이며 그 욕망을 노려 큰 마구니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현상이라도 진실을 아느냐에 따라 이러한 엄청난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니

세상을 위한 소망을 집착이며 잘못된 뜻이며 업이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출처 진실의 근원(www.ginc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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