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반야의 실체 본문
사람들은 전해들은 이야기로 반야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일어나는 우주의 근원적 차원으로 반야에 이른 해탈지경이 인간의 최고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체와 내용을 모르고 무조건 앵무새처럼 읊조리거나 숭배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는 굴레가 될 뿐이다.
오늘날 종교가 생명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진리의 실체를 모르고 형식만 강조하는데서 나타나는 부작용인 것이다.
진리는 인간이 밝혀 행할 때는 귀중한 생명수가 되지만 내용이 없이 형식만 강요할 때는 오히려 구속이 되고 독이 되고 만다.
그것은 마치 똑 같은 음식이라도 항상 좋은 음식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오래두면 갖가지 병균에 오염되어 못먹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인 것이다.
기존의 종교 들도 처음 성자들의 입에서 나왔을 때는 한치도 어김없는 복음이었으나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고식적으로 받아 들이고 자신의 의사를 개입시켜 왜곡하는 바람에 오히려 인간에게 어둠과 고통을 주는 애물단지로 변한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이 글에서는 수천년간 베일에 가려있었던 반야의 실체를 밝혀 후인들의 구도의 길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반야에 대해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 반야심경은 부처님이 남긴 경 중에 최고의 경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반야지경은 의식이 완전히 정화된 완성된 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갈 수 없는 자리로서 반야심경에 나타난 내용은 생명과 존재가 모두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우주의 근원적 자리를 가장 잘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이라고 해서 그 경이 모두 부처님의 진어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반야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 반야심경을 구술한 적이 없었으며 후세에 제자들이 반야에 대해 부처님에게서 들었던 말씀들을 모아 반야심경을 편찬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재세시에서부터 경의 편찬시까지 약 200-500년의 시차가 있었으니 그 동안 부처님의 말씀이 얼마나 미화되고 왜곡되었는지는 상식에 따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통신과 기록수단이 엄청나게 발전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두세사람만 건너가면 왜곡되는 것이 세상의 일인데 그 당시 기억에만 의존해 10-20 세대가 내려간 가운데 편찬된 경전에서 부처님의 본의가 얼마나 왜곡 되었을런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은 상식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반야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현학적인 자들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생각만으로 반야에 대한 말을 지어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럼 반야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그에 관해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는 반야심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반야심경에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라고 했지만 여기에서 관자재보살이란 깨달음을 얻은 부처를 통칭하는 것으로 꼭 관자재보살이 반야지경을 보신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당신께서 직접 반야지경에 들어가 체험하신 반야지경을 관자재보살의 입을 빌어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는 오직 하나 뿐이며 모든 부처는 동일한 반야의 체험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곧 생명의 근원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모든 명상이나 참선의 진수는 바로 생명의 근원 속으로 들어가는데 있으며 참선에서 ""본래 진면목을 찾는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명은 우주에서 가장 영묘한 것이기에 생명의 근원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우주의 근원 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게 되는데 여기에 깨달음이 우주의 완성과 이어지는 비밀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 반야의 자리는 모든 생명과 사물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유와 무의 전이대로서 삼라만상이 새로 시작되는 창조의 자리이다.
이 자리는 우주에서 가장 미세하고 근원적인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우주에서 가장 근원적인 불성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므로 반야와 하나가 된 마음은 세상과 하나가 되어 모든 실상을 깨달아 바른 이치를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반야를 본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 속에 들어가 모든 인식이 사라지고 오직 깨어있는 생명의식 하나만 남아 둥두렷한 생명의 근원을 보게 되는 것으로 인간의 오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실체인 순수한 불성 그 자체가 느끼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의 대상도 없고 의식의 영역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늙음과 죽음도 없다""는 경지는 바로 이러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반야지경은 하나의 우주적 구조일 뿐, 그것 자체가 창조력을 지닌 신령스런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완전한 불성에 의해 나타나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우주의 중심축으로서 천상계와 현상계와 지옥계는 모두 이 반야의 차원을 중심으로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육도의 모든 생명 뿐만 아니라 천상의 신들도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야의 차원을 거쳐 과거의 의식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올바른 삶으로 자신의 의식을 정화하여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의 몸과 마음은 명경처럼 맑아지고 우주에서 가장 신령스럽고 고귀한 마음을 지니게 되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신의 속성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에게서는 오욕과 미움이 사라지고 맑은 기운이 모여 백호광이 나타나며 이 세상 모든 것을 내 몸처럼 여겨 끝없는 자비와 사랑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 그 실상과 이치를 환하게 밝히게 되며 강한 생명력과 정신력으로 모든 생명을 구하고 치유하는 힘을 가지게 되며 세상을 뒤덮는 불굴의 용기로 끝없는 사랑을 행하게 된다.
오늘날 세상이 악과 어둠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것은 과거 성자들이 밝혀놓은 진리의 빛이 아직까지 세상 구석구석에서 조금씩 영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밝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보이지 않아도 진리의 힘은 크고 위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생명을 완성하여 완전한 불성을 이룬 성자는 100% 순수한 불성의 세계인 근원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근원의 세계는 신들이 머무르는 천상의 세계보다 더욱 높은 우주의 중심차원으로서 반야와 생과 사와 육도로 구성되어 있는 완전한 우주를 만들고 완전하게 유지하며 영원히 순환하게 하는 우주의 원천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곳이다.
이와 같이 완전한 불성은 자신의 완전한 모습으로 우주를 만들고 자신의 씨앗인 인간을 만들어 자신의 뜻을 세상에 시현하며 바른 이치에 따라 살아가면 다시 완성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순환구조를 구성하여 자신의 신성함과 완전함을 영원히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완전한 모습인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요즘 사람들이 귀신이 든자(무당, 심령가, 광신자 등)들의 기이한 행태를 신성한 성자들의 행동과 착각한다는 것이다. 귀신이 든자(무당, 심령가, 광신자 등)들의 모습은 신령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에 들어있는 이치는 완전히 정반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귀신이 든 자는 인간으로서 가장 삶을 잘못 산 불행하고 천한 존재인데 반해 성자들은 가장 올바른 길을 간 완전하고 고귀한 영혼이라는 점이다.
무당들이 사용하는 귀신의 술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통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헤매고 있는 귀신의 영을 사용하는 것으로 시공에 구애 받지 않는 영의 속성을 이용하여 남의 마음을 훔쳐보거나 다른 귀신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지껄이는 것일 뿐 그 속에는 바른 이치가 담긴 진실한 말은 아무 것도 없다.
귀신들은 잘못된 삶으로 인한 집착과 욕망으로 인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존재로서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지옥의 고통에 헤매이는 매우 불행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리를 절대 보지 못한다.
만약 생명의 이치를 알고 삶의 도리를 안다면 귀신이 되어 헤맬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통하다고 소문나있는 무당이나 점쟁이들도 어느 순간 귀신이 떠나가면 순식간에 신통력이 사라지고 멍한 존재가 되고 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데 접신한다는 것은 무당이 귀신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무당의 몸을 지배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오늘날 이적을 행하는 많은 종교가들 중 거의 대부분이 기존 종교를 광적으로 믿다 죽어서도 집착을 못 버리고 떠도는 영들이 씌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영적 능력을 지닌 종교지도자가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그를 숭배하고 따르나 이것은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귀신에게 오염시키는 불행한 일로써 극히 경계해야 할 일인 것이다.
종교에서의 기적은 순간적으로 이로울 지 몰라도 그의 마음을 흐리게 만들어 바른 판단을 못하게 하며 망령된 영과의 인연으로 계속 불행이 겹치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자들은 영적 현상의 한계와 위험성을 말하면서 기적을 행하는 자들을 극히 조심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반야에 이를 수 있는가?
이 자리는 우주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미세하며 오묘한 요소인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주에서 가장 신령스런 존재인 의식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의식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그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오욕과 집착이 완전히 사라지고 순수한 불성만 남은 자만이 들어갈 수가 있다.
만약 마음이 정화되지 못한 자가 이 자리에 들어가려고 욕심을 낸다면 오히려 마가 끼어 폐인이 되거나 깨달음에 한이 맺힌 귀신이 들어 세상을 망치는 악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불성과 같이 100%의 진기로 순수히 정화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오직 하나,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축복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사랑과 진실의 불이 마음속에 타올라 자신의 욕망과 사사로움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 자리는 깨달음에 대한 욕심이나 명상과 같은 인위적인 기술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자리로서 마음이 완성에 이르게 되면 하늘의 뜻에 의해 저절로 들어가게 되는 자리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구도자들이 너무 지나치게 깨달음에 욕심을 내고 있다. 그러나 깨달음에 욕심을 내어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보람 있는 공덕을 쌓지 못함을 안타까워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깨닫는다는 것도 오로지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기 위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즘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욕망에 편승하여 많은 종파와 명상가들은 참선과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하며 특정 명상기법만 수행하면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몸은 일정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신체나 의식의 특정부분을 건드리거나 집중하면 어떠한 업을 쌓았던지 간에 관계없이 막바로 생명의 중심자리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열심히 삶을 농사짓기 싫어하는 게으런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완전한 이치가 작용하고 있는 법계에서는 노력하지 않고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그런 이치는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세상의 법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무지몽매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니 무릇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이것을 깨달아 어두운 무리들을 크데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명상기법들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어지러워졌으며 밝은 이치가 사라졌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러한 명상기법들은 부처님 당시에도 육사외도라 하여 유행하고 있었고 부처님 자신도 이러한 잘못된 흐름에 빠져 고행과 명상에 몰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난 후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명상기법들은 정법이 아니며 깨달음은 오직 바른 이치로 공덕을 쌓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신 바가 있는 것이다.
지금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호흡법, 만트라, 집중법, 고행 등과 같은 명상기법들은 그 당시의 육사외도에서도 사용하던 것으로서 부처님이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세상을 유혹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간세상에 어둠과 악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오늘날 구도의 길을 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악지식과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반인들보다 더 나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 올바른 공덕을 쌓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반야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때를 완전히 지워 영원히 반야의 자리에 합일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반야의 체험을 얻고자 하는 명상기법들은 모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인연을 끊고 고요히 앉아 명상을 수행하면 어지러웠던 마음이 가라앉아 맑은 거울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혼탁한 마음의 찌꺼기가 세상과의 인연이 끊어짐으로써 말미암아 잠시 밑으로 가라앉아 위에 맑은 물이 고여 거울이 비치는 듯이 느껴지는 것으로 다시 세상과의 인연을 만나면 가라 앉았던 흙탕물이 피어올라 흐려지게 되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많은 구도자들도 바로 이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맑음과 흐림을 계속 반복하며 때를 지우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하는 자는 마음속의 흙먼지를 수동적·회피적으로 가라앉히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이를 근원적으로 씻어낼 적극적이고도 참여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흙먼지를 완전히 씻어내 버리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가라앉은 먼지가 다시 일어나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맑은 거울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완전한 해탈은 절대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정화하여 순수한 불성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세상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세상을 축복하는 길밖에 없으며 세상을 올바르게 축복하고자 바른 삶의 길에 자신을 바칠 때 마음속에 진실의 불이 타올라 자신의 사사로움과 헛된 욕망이 사라지고 오직 순수의 불성만 남게 되는 것이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이 그 동안 세상을 축복하는 공덕행을 통하여 모든 애욕과 집착을 버리고 맑고 맑은 마음 하나를 얻어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게 된 때문이었다.
이것은 모든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필수적인 과정으로 마음이 완성되게 되면 하늘이 정해놓은 이치에 의해 저절로 반야로 인도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는 새벽별이 보이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모든 존재가 사라지고 새로이 시작되는 우주의 근원자리인 불성만이 존재하는 반야를 보게 되었으며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걸리지 않는 마음의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수행의 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생을 예로 들면서 당신은 자비의 마음으로 수많은 생을 돌며 세상을 축복하는 공덕을 쌓은 결과 이 땅에 이르러서 비로소 해탈(인간완성)을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해탈은 고행이나 요가와 같은 명상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고 분명히 천명하셨던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러한 뉘우침이 있어 이 글에서 밝히니 후인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지난 세월 동안 나 또한 진리에 뜻을 두고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진리와 참다운 인간의 길을 찾아 갖가지 수행을 하고 요즘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체험을 하였다.
기를 느끼고 대주천을 했으며 단을 맺어 성태를 하고 유체이탈을 하였으며 무자화두를 깨고 적멸에 들어 며칠간을 몰아지경에 머물기도 했으며 사하스하라 차크라가 열려 하늘빛 속에 들어 몇시간을 범아일여의 열락에 들기도 했지만 고서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과는 달리 깨달음은 열리지 않았고 나의 마음속에 과거와 다른 변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가만히 앉아 깨달음을 기다리는 가운데 세월은 무심히 흘러 나는 3년이란 세월을 홀로 애태우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홀로 앉아있는 시간이 허망하게 느껴지면서 부처님의 일화가 사실일 것이라는 생각이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선정삼매 속에 들어있는 고요한 적멸은 진정한 반야의 체험이 아니었고 사하스하라 차크라가 열려 정수리에 하늘의 빛이 들고 열락에 빠져든 것도 절대적 신성과의 완전한 합일이 아니었으며 성태를 맺어 출신하는 것도 번뇌가 남아있는 마음이 새로운 중생 하나를 더 만드는 것에 불과했을 뿐 아무런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요가수행의 헛됨을 한탄하며 진정한 깨달음은 오직 세상을 축복하는 보살행과 공덕의 축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신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에게 깨달음이 열리지 않았던 것은 부처님이 이미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세상을 위해 애를 태우며 선업을 쌓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마음만 비우려 했기 때문에 타고난 선업 이외에는 더 이상 공덕을 쌓지 못하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무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러한 수행의 정법을 분명히 밝히니 지금 명상의 길을 가고 있는 수많은 후인들은 마땅히 이를 명심해 수행하는 그 정성으로 세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축복하는 원인을 지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깨달음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은 성자의 능력도 전지전능이 아니며 우주의 철칙인 자연법에 종속되며 인간의 몸을 가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성자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각 생명이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주체성의 원리와 완전한 인과의 이치에 의해 각자가 지은 바에 따라 업보를 받는 우주의 원리를 성자라고 해서 인위적으로 이를 어기고 조정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성자는 각 생명주체들에게 이렇게 살면 이런 결과를 받게 된다는 진리만 이야기할 뿐 그것을 따를 것인지의 여부는 각 주체에게 달린 것으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르지 않고 불행이 좋아 그 길을 가는 중생들에게는 부처도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연 없는 자는 부처도 어찌할 수가 없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부처가 살아 생전 자신의 조국이 망하는 것을 보고도 어찌하지 못했던 것은 이미 그의 조국이 과거에 지은 업보가 생생한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조국(카필라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국민들이 바른 법을 배워 좋은 공덕을 행하고 정직과 신뢰로 건강한 나라를 가꾸어야 했지만 그 나라 백성들은 미신에 빠져 좋은 원인을 지을 줄 몰랐고 욕망과 이기심에 뿔뿔이 흩어져 외국의 침략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성자들이 세상에 진리를 전하려 해도 사람들이 모두 욕망에 빠져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자들을 해하려 한다면 이것은 성자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바른 이치와 진리만 전했건만 이것이 귀에 거슬리는 자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손상되고 위선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죽음을 가했으며 노자는 제자 한명없이 일생을 헤매다 국경너머로 사라지고 말았으며 석가는 제자 8명만 거느리고 말할 곳을 찾아 전국을 맨발로 유람하다 쓸쓸히 길가에서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이것이 어두운 말세에서 진리가 겪어야 하는 불가피한 운명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이 길만이 인간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이며 보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불성의 현현으로 나타난 존재로서 완성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려운 세상에서 고생을 이겨내고 진리를 실천할수록 더욱 인간의 가치가 고양된다는 하늘의 깊은 뜻이 이 세상에 깃들어 있음은 하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어둡고 무지한 세상일수록 진리와 사랑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마음속에 사랑과 진실의 불이 더욱 강하게 타오르게 되어있어 마음속에 쌓여있는 티끌을 쉽게 태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는 오탁악세에서만 날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시궁창에서 연꽃이 피는 불교의 깊은 뜻과 오묘한 삶의 의미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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