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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길

윤회와 무아

gincil 2013. 4. 21. 22:31

윤회에 대해 의문들이 많은 듯하다.

부처님이 고정불변하는 나의 실체가 있느냐에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후 초기의 제자들은 약간의 의문은 있었지만

윤회를 이어가는 고정불변하는 아트만이라는 실체는 없지만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윤회를 이어가는

존재는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였다.

 

독화살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제자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느냐 하는 실천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지

그러한 논리적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본질적으로 헤아림에 불과한 무기에 속하는 이 문제는

수백년이 흘러 학승들이 체계를 잡고 불경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논리를 중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수백년간의 이론적 정립을 거쳐 초기 불교계는

아의 실체를 무아론으로 정립하였는데

이러한 논리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기론과 배치되는 현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은 초기 제자들이 정법을 깨치고 공덕을 쌓아 선근을 얻었기에

다음 생에는 모두 부처에 이를 것이라고 수기를 주었는데

무아론이 정립되어 이생과 후생을 이어서 업과 공덕을 실어 나를

윤회의 고리(종자)를 부정하다보니

윤회와 수기현상 사이의 모순을 설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당시 불교계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법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현실 속에 자리를 잡을 무렵인

초기 200~300년간은 유위법이 대세였다.

이들은 사실에 기초하여 명확한 인과의 이치를 밝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하는 사실들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현상을 이루는 원리(, 다르마)를 밝히려 했다.

 

이 학파의 철학체계는 장기간에 걸쳐 여러 가지 발전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지마는

'모든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 기본입장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존재하는 사실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세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완전한 법칙에 의해 나타나는 세상의 흐름을 법(다르마)라고 했다.

 

사실 속에 존재하는 현상들과 그 이치를 알면

세상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그들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내면세계와 객관세계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을 제법분류법이라고 하는데,

구사론에서 말하는 5 75법이 그 완성된 모습이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은 모두 기존에 존재하는 요소들이

다양한 인과관계를 맺어 세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모든 것은 연기법으로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 무위법은

후기의 대중부나 대승의 해석과는 달리 일종의 유적 형태였으며

부처님의 해탈심 또한 인과관계의 결과로 나타나는

하나의 유적 존재였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법()이라는 것은 삼세(三世) 어디서나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법은 삼세(三世)에 실유(實有)한다고 했다.

이를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유론은

몇백년 동안 구전을 통한 와전과 변형을 겪고

20여개 부파간의 독특한 이론적 전개로 말미암아

점차 사실에 입각한 정법은 흐려지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들은 수많은 분파로 나누어

논리적 투쟁을 거쳐 정설과 다수설을 정립했는데

그들의 생활환경 풍토가 자신들이 성장한 힌두적 분위기였기 때문에

많은 힌두적 관념이 불교체계 속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사실에 입각한 단순명확한 가르침을

문자화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갖가지 부연설명을 하고 형식화하여

점차 말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며 자연스레 힌두적 사유방식과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도입하게 된다.

 

그들은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하여

각각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해설하고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으며

이를 정리할 필요성에서 엄밀히 분류하고

특징에 따라 일정한 체계로 틀을 짰다.

 

이때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관계있는 교설을 숫자에 따라 정리하는 방법으로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과

동일한 주제를 한 곳에 모아  정리, 배열하는 방법들을 사용했다.

 

삼법인, 사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라는 분류들도 원 가르침에는

평범한 언어로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었으나

부파불교의 논사들에 의해 정의되고 개념화된 용어들인 것이다.

 

그들은 법(다르마, 진리)이 무엇이며

무상(無常), (), 무아(無我)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논리적 체계 속에서

엄밀하게 분석해가며 차근차근 틀을 구축해 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불교를 체계화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사제, 팔정도 무상 무아라는 개념을 구축해나가면서

이러한 단편적인 정의들이

부처님의 전체적인 말씀과 모순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부처님의 실상에 입각한 가르침을

자기 마음대로 평가하고 정의내린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불교는 새로 나타난 자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온갖 철학적 논리를 전개하며 사변의 깊이를 더해가게 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아론과 윤회론 사이의 쟁점이다.

 

윤회론을 부정하는 불교의 기본교리로 제법무아가 있다.

모든 것이 무상하니 이 세상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이 없으며

나라는 것도 결국 사라지는 것이니

나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그 논거로 다음과 같은 아함경의 구절을 제시한다.

 

“소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불변하는 것이냐? 변화하는 것이냐?”

“변화하는 것입니다.”

“만약 변화하는 것이라면 괴로움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

“괴로움입니다.”

“만약 변화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이는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이는 나의 본질이다.’ 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것을주체로서의 나라고 말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구절을 근거로 그들은

이 우주 현상계에 들어있는 모든 생명적 존재들은

전부 무상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고,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무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상하고 변하기 때문에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의 곁에서 시봉하고 있던 제자들은 부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변화로 인하여 부처님께 배운 정법을 원인으로 완성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라는 말은

변화가능성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한 제한된 논리인 것이다.

 

그리고 불교학자들이 무아의 근거로 오온의 무상함을 주장하는데

그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오온(, ,,,)중에

고정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의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원시경전에서 무아를 논하는 방식은

남방 팔리어 경전이든 북방 아함경이든 모두색은 나가 아니다고 밝히고

다시수상행식도 이와같다는 식의 부정적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남방의 상응부경전 무아상경을 보면색은 나의 것이 아니다.

색은 내가 아니다. 색은 나의 아트만이 아니다.”고 표현하고 있고

잡아함경에도색을 가진 것은 일체가 나가 아니고

나와 다른 것도 아니고 서로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어법은 오온을 자아로 생각하여

그에 집착하는 아집을 무너뜨리기 위한 방편으로

색을 나로 알거나 나를 색을 가진 것으로 알거나 색이 나 속에 있다거나

내가 색중에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밝히신 것이지

의 실체가 모두 ''임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불교학자들 중에는 무아가 아니라

비아가 부처님의 본래 의도였다고 하는 논지를 펴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즉 영원히 불변하는 나의 실체는 없지만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동일성을 유지하는 윤회의 주체는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아설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부처님은 이생에서 부지런히 배워서 진리를 깨치고 좋은 선근을 얻으면

후생에서도 법을 바로 보게 되고 더 많은 공덕을 지을 수 있어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 바 있다.

 

이 말씀은 이생에서 얻은 좋은 덕성을 이어가는 윤회 주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혼돈되지 말고

명확한 부처님의 진의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것은

이 세상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자아 또한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된 아가 없다고 하신 것이지

윤회를 이어가는 주체가 없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윤회를 설명하는 좋은 비유가 있어 들어본다.

 

강물에 발을 담갔다 빼고, 다시 발을 담글 때

처음 발을 담근 강물과, 뺐다가 다시 담군 강물은 같을 강물일까?

 

처음 발을 담근 강물은 이미 아래로 흘러갔고,

다시 발을 담글 때의 물은 위에서 새로 내려오니 다른 물이다.

 

하지만 물이 다르다 해도 우리는 같은 강물이라 한다.

강물은 흘러가고 다시 내려오면서 변하지만 여전히 같은 강물인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강물은 없지만,

변화하면서 하나로 인식되는 강물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촛불은 단일한 불꽃으로서 지속적인 빛을 낸다.

그러나 불꽃은 한 순간 마다 다른 기름이 타서 나타나는 빛이니

현재의 빛이 과거나 미래의 빛과 같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불꽃이 지속성을 보이는 것은

한 순간의 불꽃과 곧바로 연속되는 불꽃 사이에

인과적 연결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앞의 불꽃이 뒤의 불꽃을 피우게 할 때,

어떤 영구적 실체가 있어 앞에서 뒤로 이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둘 사이의 인과적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촛불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비유에서 하려는 말은

'영혼'이나 '자아'라고 부르는 어떤 영구적 실체를 가정하지 않고도

연기법에 따른 지속적인 연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철학적 논리 대신에

의식과 윤회의 주체에 대한 실상을 밝힘으로써

무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부처님의 법은 추상적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관한 진리를 밝힘으로써 모든 희론을 잠재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기운 속에 의식이 깃들어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의식이 외부의 인연을 만나면 마음을 낸다.

이 마음의 경험이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업이 되고,

정화하여 완성으로 이끌기도 한다.

 

이때 한번 지어진 습은 계속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선을 권하고 악을 멀리하기 위해 칠불통계가 있는 것이다.

 

" 모든 악을 짓지 말고 (諸惡莫作모든 선을 힘써 행하여(衆善奉行)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自靜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是諸佛敎)"

 

이 영체는 살아있을 때 육체 속에 거주하면서 삶의 경험을 자신 속에 담게 되고

죽어 그 사람의 결실로서 분리되어 이 세상을 떠돌게 된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 인간의 삶의 열매로 나타난 영혼은

자신이 지은 업과 인연에 따라 후생을 받게 되는 것이니

잘 지은 열매는 풍성한 수확을 낳고 잘못된 쭉정이는 버려지는 화를 당하게 된다.

 

즉 평범한 삶을 살아 인간의 근본을 크게 망치지 않은 사람은

다시 인간의 몸과 인연을 맺어 인간으로 나타나 중생의 삶을 이어가게 되고

바른 삶의 길을 알고 좋은 원인을 지은 자는

그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농사지어 천상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잘못된 삶으로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한 흐리고 탁한 영혼은

유계로 떨어져 지옥의 고통을 받아 영체가 메마르고 갈라져

미물로 나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흩어져 풀로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식을 띤 기운체(영체)

자신의 업에 따라 무수한 변화를 일으킨다.

 

현재 유혼 상태에 머무는 영체가 현존 인류보다 더 많은데

이러한 유혼들은 피폐해져 갈라지게 되므로

저차원의 영체는 무수히 생기게 된다.

 

이와 반대로 고차원으로 갈수록 영체의 기운은 흩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모든 고등 생명체의 자손은 한둘인데 비해

하등동물의 자손은 수천 수만에 이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아라한과 같은 불퇴전의 영체들은

윤회시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유지하게 되고

아무리 어려운 곳에 태어나더라도 어둠에 물들지 않고

고해의 난관을 복밭으로 삼아 완성의 거름으로 사용한다.

 

그 외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운이나 생명체가

오랜 스침과 인연을 통해 의식을 띠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오래된 나무가 신령스러워져

꺽으면 해꿎이를 당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오래된 생명체도 많은 인연을 겪다 보면 의식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주에는 무수한 영체가 무한의 영역에 걸쳐 존재하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만나고 흩어지고 변화하며 순환한다.

 

따라서 부처님은 불변하는 아트만의 실체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러한 항구불변하는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은 업에 따라 변화하면서도 인과에 의해 한치의 어김없는 결과를 받는

윤회는 존재한다는 것을 말씀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 실상을 모르니 헤아림 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논리가 나타나고 쟁론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윤회의 실상에 대해 더 살펴보자.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영체는 반야에 들어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자신을 다시 재생시키기 위한 우주의 원리이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알이 완전히 썩지 않고서는

새로운 싹으로 부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도 모든 것이 다시 사라지는 반야의 차원을 지나

모든 기억을 다 지워버리고

다시 자신의 씨앗을 인간의 몸에 심어 새 생명을 받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나는 죽어버리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로 모든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고 태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영혼이 과거의 사사로운 사연이나 인연을 이어 담아

후생에 다시 그대로 난다는

드라마적인 윤회 시나리오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이 힌두적인 소박한 윤회관을 부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람이 새로 태어나면 과거의 모든 기억은 사라지지만

과거 자신이 지녔던 시각과 마음, 소질과 성격 등은 그대로 지니게 된다.

 

마치 콩을 심을 때 그 출생지가 어디인지 몰라도 콩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떤 품종이며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람도 과거의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사람의 성품과 기질을 보면

과거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과의 흐름에 의해

단일성과 지속성이 하나로 이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비록 과거와 나는 단절되어 있으나

나의 삶은 다른 나의 후생에게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미래의 나도 현재의 나를 전혀 알 수 없으니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미래의 나에게 미안하거나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서로 간에 의식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 업은 상호간에 서로 이어져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우리는 곡물상에서 많은 콩을 보게 된다.

그 수많은 콩은 하나 하나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속에 실한 것도 있고 부실한 것도 있는데

그 중 실한 것은 과거에 좋은 품종을 지니고

좋은 토양에서 자랐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 콩을 좋은 곳에 심으면

또 다시 큰 수확을 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말없는 콩에서도 우리는 인과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들에게서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이 밝은 사람은 이러한 인과의 이치를 깊이 느끼며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세상에 대해서도 책임지지만

업이 많은 자는 이러한 이치에 대해 어둡기 때문에

모든 것이 결과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인과를 믿지 않고 함부로 살아 그 심성이 악해지면

그 사람의 영체가 여러 개로 나뉘어졌을 경우

악하고 탁한 습을 많이 지닌 인간이 많이 나타나

세상을 어둠과 고통 속에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가 단일한 불변의 영혼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생존이

인과적 사슬로 이 세상과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아적 윤회설이 윤리와 도덕에 대해 함축하고 있는 뜻은

매우 심대하고 중요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업보로 서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의 행위에 책임지지 않는다면

악한 나의 업보가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후생에 남아 번지게 되어

미래의 나의 가족과 친지와 후손들이

악한 업보를 지닌 나의 업을 지니고 태어날 수많은 악인들에 의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인심이 동굴이나 정글 속에 살았던

옛 선조들보다 나은 것이 없고

짐승의 세계에도 비교되지 않는 미친 전쟁을 하고 있으며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사악하며 생명을 죽이는데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거의 잘못된 업이 연속되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인과의 철칙을 무시하고

나의 업이 설마 후생에 이어지지 않겠지 하는 근시안적인 무지에서

선대의 인간들이 함부로 악을 저지른 결과를

후대의 인간들이 이 생에서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부처님이 영원불변한 윤회의 실체는 없지만

윤회와 업의 재생이 있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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