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공리주의(功利主義)에 관한 질문입니다. 본문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는 유럽사회가 종교개혁을 거쳐 근대화되면서, 합리적이고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도덕적 사회적 행동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나타난 철학사상입니다.
대표적인 주창자는 영국의 경험론자인 벤담으로 그는 영국의 경험적 전통에 따라 오직 사실로 나타난 결과를 중시하여 결과에 따라 선악이 결정되며 법과 제도 또한 결과에 따라 그 유용성이 판단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인권이나 자연권같은 관념적 주장이나 동기가 얼마나 선했느냐 하는 것은 선악의 결정에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결과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따라서 사회 다수가 즐겁고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면 그것은 좋은 행동이고 좋은 제도이며,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도 다수가 이익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윤리적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행동과 사회 정책은 개인의 이익과 쾌락의 합이 최대가 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슬로건으로 제시합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사상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과거의 사상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쾌락주의를 주창한 에피쿠로스 학파로부터 시작하여 직접적으로는 프리스틀리라는 당대의 과학자가 이야기했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글귀를 읽고 공리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진리의 시각에서 볼 때 공리주의는 선악과 행동의 기준을 사회 전체의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결과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결과 중시의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모든 판단의 근거를 결과에 놓고 보는 우리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즉 우리의 가르침은 어떤 행동이 객관적인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때 좋은 원인으로 보며, 반대의 경우는 나쁜 원인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나쁜 원인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으며 좋은 결과에는 반드시 좋은 원인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쁜 사람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반성해서 좋은 원인을 지었거나 아니면 소발에 쥐잡기 식으로 무심코 한 일이 우연히 그 사회에 적합한, 좋은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일은 상황 속에서 가장 올바른 원인을 지었기 때문으로 좋은 원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리주의는 유럽 근대의 정신적 혼란 상황 속에서 명확한 가치판단 기준과 정책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신적으로 공리주의는 중세처럼 신으로부터 주어진 도덕률이나 관념적 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도록 살아야 한다는 가치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개인의 윤리의식이라든가 가치관 그리고 영미 자유주의 입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국민 다수의 부담을 줄이고 행복을 늘리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간단할수록 좋다고 하는 주장을 제시하여 자유방임주의 국가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으며, 나아가 사회의 행복을 최대로 하려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어 사유재산 보호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분배의 평등을 실시해야 한다는 복지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형법에 있어서도 사형이나 처벌을 가할 수 있는 근거로, 그러한 제재가 범죄자를 교화하거나 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함으로써 더 이상의 범죄를 막고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범죄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으므로 정당화된다는 논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최대 다수의 쾌락과 행복을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눈뜬장님인 중생이 선과 악의 기준과 행복의 진실을 볼 수 없었으니,
벤담은 중생의 시각으로 자연스레 물질적 육체적 쾌락을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했으며 이러한 쾌락의 양은 측정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은, 행복과 쾌락이 무엇이냐는 것부터가 철학적으로 아직 정답이 없는 문제이며 또 주관적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고 반박하게 됩니다. 이러한 반론을 의식한 듯 그 제자인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은, 초기의 벤담과는 달리 양적 쾌락에서 질적으로의 쾌락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쾌락을 정신적 쾌락으로 대체했을 뿐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새로운 설명이나 철학적 통찰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반대론자들은 공리주의자들이 행복과 쾌락의 당위성만 주장할 뿐 행복과 쾌락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으며, 또 스스로 경험주의를 자처하면서도 행복과 쾌락의 결과에 대해 경험적, 과학적 논증을 하지 못하는 것은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에 대한 주장을 공허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하며, 행복과 쾌락을 윤리, 선악 및 정책 판단의 기초로 삼은 것은 비철학적이고 불완전한 주장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실상의 일과 진리를 보지 못하는 중생 세상의 영원한 다툼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진정한 인간의 행복인지, 개인의 행복과 전체의 행복과의 관계성을 알지 못하니 안개 속에서 서로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이전투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상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근대철학의 한계입니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는 중생의 시각을 지닌 철학자들이 최대다수가 최대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진리 속에 있는 행복의 본질적인 의미와 이치를 알 수가 없었으므로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 기준이나 사회정책의 근거로서 영원한 생명력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 공리주의에서 추구하는 행복과 쾌락은 세상 전체의 물질적 쾌락을 향상시키는데 그쳐서는 안 되며 정신적 만족과 인간완성의 길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길을 바로 알 때 비로소 나의 행동이 상대와 세상에 도움이 되며 궁극적으로 물질과 정신적 갈증이 모두 해소되는 완전한 행복과 이상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
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는 공리주의를
진리의 시각에서는 어떻게 보는 것이 맞으며,
2. 공리주의가 실제로 세상에 끼친 좋고 나쁜 영향은
현실 속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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