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불성이 움직인 이유 본문
완전하고 순원무잡한 불성이 고요히 반야에 머물지 아니하고 구태여 움직여 번뇌와 망상이 가득한 환영과 같은 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은 동양철학의 영향하에 놓여있는 사변가들의 근본적인 화두이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그 전제가 사실에 어긋난 추상적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화두에 대답하기에 앞서, 완전하고 무염무잡한 불성이 왜 적멸에 머물러야 있어야 하고, 아름답고 활기찬 이 세상이 왜 환상이며, 해탈이 왜 세상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먼저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불교계가 염세적인 해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환상이고 인생은 고이며 해탈은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으로 그 본의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불교계의 생명력을 뿌리 채 흔들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고질병인 것이다.
오늘날 불교계가 세상을 환이며 고라고 보는 것과 달리 부처님께서는 만년에 상업도시 베살리에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의 삶은 매우 감미로운 것이니 이세상에 태어난 이상 살아가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이라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이 이 세상을 가르켜 고해(고통의 바다)라고 한 것은 진리를 모르고 헤메고 있는 중생들의 삶을 가르켜 고해라고 한 것이지 하늘의 뜻과 진리를 알아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 가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조차 세상이 고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진리의 길을 알고 매사를 보람있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세상은 고통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완성하고 축복해 나가는 복밭이며 기쁨인 것이다.
이 세상을 환이며 뜬구름이라고 보는 견해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무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무상의 본래 뜻은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허무하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으며 변화 속에 좋아지거나 나빠지고 있으니 좋은 변화를 얻도록 하라'는 뜻인 것이다.
따라서 끝없는 변화 속에서 각 주체는 순간 순간 세상의 중심이 되어 계속 빛나고 있으니 좋은 결실을 얻도록 좋은 원인을 계속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대가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 이 현재가 우주적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는 우주의 중심이며 구체적 삶의 실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세상의 이러한 우주 중심성을 부정한다면 인간의 삶의 의미와 존재근거 자체가 사라진다.
우주는 이 세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 우주가 현세로 말미암아 유지되고 지탱된다.
천상과 지옥도 이 세상을 통하여 새로운 기운을 공급받으며 계속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상과 지옥의 세계는 현세의 결과를 통해 새로운 기운을 계속 공급받고 있으며 천상에 계신 신과 제불보살도 이생에 다시 태어나 바른 행위를 닦음으로써 비로소 완성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전제의 오류성에 대해 어느 정도 논의가 된 듯 하므로 본래의 주제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불성이 적멸에 머물지 아니하고 움직이는 이유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움직여야 한다는 우주의 기본원리에 근거한다.
따라서 우주의 근원인 불성이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움직여야 하며 움직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감각할 수 없고 감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움직임과 순환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물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지구, 우주에게도 마찬가지로 필수불가결한 존재방식이다.
사과가 사과를 맺어 사과임을 나타내고 소가 소를 낳아 소의 역할을 다하듯이 불성도 적멸에 머물지 않고 이 세상속에서 자신의 완전성을 시현하고 완전한 열매를 낳음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완전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앞의 전제에서 세상사람들이 착각해 왔듯이 불성이 완전하다고 윤회를 벗어나 적멸에 머문다고 한다면 불성은 자기의 존재성을 완전히 부정해버리고 말 것이며 이 우주는 그 즉시 영원히 소멸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 세상이 눈앞에 나타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불성의 소이임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불성의 미혹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불성의 본질적인 속성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완전한 불성은 자신의 완전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완전한 법칙과 완전한 세상을 만들고 자신과 같은 자율성과 창조성을 지닌 인간을 탄생시켜 지은 대로 결과를 맺는 완전한 세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그릇된 길에 빠져 나쁜 원인을 지은 것은 불안과 고통 속에서 지옥의 길로 빠뜨려 소멸시키고, 바른 이치에 따라 신성한 뜻을 완성한 이는 성인이라는 완성된 열매를 맺게 함으로써 자신의 완전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흐름에 있어서 불성의 속성은 일반적인 불교계의 오해와 달리 적멸이 아니라 사랑이다.
부처님께서 이미 수천년 전에 갈파했듯이 깨달음은 수행이나 고행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를 통한 공덕(사랑)의 실천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명히 갈파한 적이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욕심내는 사람들은 해탈을 갈망하나 해탈을 한다 하더라도 세상을 축복하는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인 만큼 인생은 해탈이 목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지속인 것이다. (늘상 이야기한 바이지만 사랑이란 남녀간의 애욕의 사모가 아니라 상대의 생명에 대한 진실한 축복의 길을 전해 주는 인간애의 발로를 말한다.)
그리하여 불성은 사랑으로 세상을 낳고 완전한 인과의 이치 속에 사랑을 키워 완성에 이르게 하고 사랑의 길에서 벗어난 것은 소멸하게 하는 완전한 자기정화 과정을 거치면서 영원한 순환을 지속하는 것이다.
즉 불성은 완전한 뜻 속에서 자신의 완전한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면서 인간이라는 신성의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이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늘의 뜻을 꺽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지켜 키워나가면 마침내 신성을 완전히 증득하여 자신과 같은 불성의 경지에 오르게 하여 또 다시 세상을 창조하는 완전한 순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완전하고 장엄한 불성의 흐름이며 현현이란 말인가?
그래서 불성은 우주의 원인으로 작용하나 현재의 완전한 형태로 자존하고 있으며 앞으로 영원히 완전한 모습으로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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