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현상과 본질 본문
인간의 진리에 대한 인식 가능성과 관련하여 밖으로 보이는 현상을 뛰어넘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느냐 하는 현상과 본질의 문제가 나타난다.
서양사상의 기본틀은 현상세계를 넘어 본질의 세계를 찾아가는 구도를 갖는다. 플라톤에 의해 정형화된 서구철학은 현상계와 이상계를 엄격히 구분하여, 진리는 현상 속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반드시 이상계에만 존재한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도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구분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서, 신의 영역인 저 세계는 어린 양들이 결코 알 수 없으며 오직 메시아에 의한 계시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래서 현상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서구의 이원론적 시각이다. 이와 같이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나타난 서구철학의 인식론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실제로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능력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상과 인식능력이 서로 만나, 사유를 통해 대상에 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 그 대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인들이 과연 그 대상을 실체 그대로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 성자들은 일반인들은 겉모습만 보지 본질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일반인들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으며, 석가모니는 중생들을 눈앞의 일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장님과 같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자신이 겉으로 보는 것이 그 일의 정확한 실체인가를 심각히 고민해 봐야 한다. 사실상 현실에서 일반인들이 진리의 영역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인류역사 동안 수많은 세속의 지도자들이 자신이 옳다고 하는 정책을 시행했으나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세상이 더욱 나빠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여 행동한 일들이 사실과 틀린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로 보고 적합한 원인을 지었다면 나빠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세상의 일은 진실을 바로 보고 행동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현상 속에 깃들어 있는 본질을 알기 위하여 수없이 코끼리를 만지고 그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지금 우리 철학계의 현실은 코끼리는 간데 없고 이상한 괴물만 나타나 있는 것이다.
우주의 실상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 철학계는 욕망과 혼돈으로 치닫는 현대문명에 아무런 정신적 질서와 가치를 제시하지 못한 채 세상을 무의미와 무질서 속에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실상을 밝히고 정신적 질서를 제시해야 하며 이를 하지 못하는 철학은 공리공론이며 시간낭비인 것이다.
모든 철학과 구도의 길은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그 이치를 밝혀 인간의 삶을 인도하는 궁극적인 진리를 밝히는데 공통적인 목표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철학은 우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깨달음의 지혜와 접목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철학과 깨달음의 궁극적 합일점이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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