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공덕행을 해야 하는 이유(수행의 요체) 본문
그 동안 수행계에 있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많은 방법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불교의 팔정도와 위빠사나, 주문과 참선,
도가의 단전호흡과 선정, 기독교의 기도와 묵상,
힌두교의 하타, 박티, 라자, 카르마, 즈나나요가 같은
방법들이 있는가 하면
요즘에는 동양의 지혜에 대한 바람을 타고
막바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각종 명상비법들도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하는 부처님이
어떤 원리를 통해 인간이 해탈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음으로 해서
사람들은 아직도 삶과 수행 사이를 헤매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는 원리와 방법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들 중에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깨닫기 전에는
자기가 깨달은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전혀 확신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태어나는
인간들은 모두 똑 같다.
부처님도 자신이 깨달음에 이를 운명이라는 것을
전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고행과 선정 사이를 헤매다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는 원리와 과정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깨달음은 고행이나 선정에 의해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돌면서 쌓아 놓은 공덕이 세상을 가득 덮을 만하여
그 인연에 의해 이생에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셨을 뿐
수행법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수행계는 깨달음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실체를 갖지 못하고 혼돈 속을 헤매고 있으며
그 틈을 노려 갖가지 수행법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수행의 근본 요체와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각종 수행의 한계에 대해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근원의 세계인 반야를 보아야 한다.
이 반야의 세계는 바로 모든 것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자리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극미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근원과 하나가 되어야만
모든 것과 통할 수 있고 삼세를 보는 혜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모든 부처는
반야로 말미암아 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의 근원인 반야의 세계에는
업을 가지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때가 있어서는 합일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명제 때문에
수행에 대한 기준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즉 모든 수행은 반야에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업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 없다.
그러면 각종 수행과 업과의 관계를 논의하기 전에
먼저 업에 대해 알아보자.
업이란 전생이나 과거의 삶을 통해 자신 속에 쌓은 일들로서
한번 지어진 업은 절대 저절로 사라지는 법이 없다.
따라서 현실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다시 그 성질을 일으켜
행동에 영향을 주어 운명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한번 죄를 짓거나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되면
계속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게 되므로
모든 선을 권하고 모든 악을 경계하라는
칠불통계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선업이란 무엇인가?
선업이 무엇이라고 정의내리면
또 다시 그 말한 내용에 대해 묻기 때문에
끝없는 질문이 되풀이 된다.
그래서 성자들은 반어법을 많이 썼다.
거짓을 하지 않고, 질서를 어기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고, 낭비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겁간하지 않고,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이
선업이라고 했던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정직하고,
실상과 이치를 배우고, 부지런히 일하고,
행한 만큼 이치대로 받고,
세상을 잘 되기를 바라고 축복하는 것 등이 선업인 것이다.
그러면 악업은 무엇인가?
바로 이와 반대되는 일들인 것이다.
선업은 세상의 일을 밝혀 이치대로 실천함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고 세상을 축복하는 것이며
악업은 이치를 어기고 삿된 욕심을 부려
정신을 흐리게 하고 세상에 죄를 짓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빛과 어둠과 같아서
서로 다른 유형의 반대되는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밝음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고
어둠이 짙으면 밝음이 숨을 쉴 수 없는 것과 같이
악업은 업을 짓는 것이며 선업은 업을 지우는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선업마저 업으로 해석하여
선업마저 짓지 말아야 한다는 함부로 말하는 것은
말법에 의해 오도된 현대불교의 치명적 병인 것이다.
그래서 선업을 지으면 중생의 운명을 받아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밝고 강한 선근을 얻어 악업에 물들지 않고
모든 것을 사실과 이치에 맞게 행하는 관계로
공덕이 쌓여 선과의 고리를 돌아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선업을 짓고 살면
마음에 어둠이 깃들 이유가 없으며 세상이 악해질 이유도 없다.
희귀한 인연으로 사람으로 태어난 짧은 인생을
좋은 일을 하기도 바쁜데 악업을 지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선업과 악업은 과거의 삶을 통해
자신의 마음 속에 혼재되어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
선업에 의한 맑은 마음도 자기이며
악업에 의한 탁한 습성도 자기이다.
그러므로 수행이란 자기 속에 들어있는
이치에 어긋난 탁한 습성을 제거하고
욕망과 집착과 이기심에 걸리지 않고
모든 것을 이치대로 축복하는 맑은 정신을 기르는 것이다.
실상과 이치에 따라 거짓없이 살면
업이 붙지 않으며 맑은 마음을 기르게 된다.
그래서 생각으로 살지 않고
자연의 흐름과 하나되어 이치대로 살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수행계에서는 소아와 대아를 구분하여
수행을 나 속에 있는 소아를 버리고
외부에 있는 별개의 대아를 찾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참 위험한 생각이다.
나를 벗어나 별도의 대아나 공함이 있는 것이 아니니
만약 나라는 실체를 벗어나
별도의 존재인 대아나, 한마음, 공성, 무를 찾는다면
허공의 탈을 쓴 큰 귀신인 떠도는 공귀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의 업을 지우지 않은 채 나를 먼저 지워버리니
주인없는 업이 많은 나의 몸뚱아리에
외부에 떠도는 공귀가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깨달음에 대한 욕심을 내어서는 안되며
세상을 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많은 수행법들이 왜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는데도 큰 효과가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이 업을 지워야 한다는
수행의 요체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잘못된 관념에 빠져 엉뚱한 곁가지만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든 업은
수많은 전생의 삶의 흔적들이 자신 속에 쌓인 것이다.
따라서 땅에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듯이
수많은 생을 통해 지은 숙생의 업은
다시 삶의 실천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수행법은 이러한 인과를 알지 못하고
삶과 수행을 별개의 것으로 보아
현실을 멀리하고 마음만 깨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자연히 수행과 삶이 괴리되고
업을 지우는 효과가 미흡했던 것이다.
명종때 평생을 수행한 당대 최고의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삶의 실천을 통해 현실 속에서 욕망을 극복하지 아니하고
생각 속에서만 욕망이 덧없다는 것을 깨쳤으니
막상 현실에 부딪히니 한순간 황진이의 교태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환으로 보고 수행과 삶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 기존의 수행법들은
모두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환이 아닌 것이며
삶이란 자신을 축복할 수 있는 기회의 복밭인 것이다.
그럼 각 수행법에 대해 살펴보자.
단전호흡과 같이 기를 받아 정기신 수련을 하는 것은
정기신이란 수행단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로서 몸에는 변화를 줄 수 있지만
기보다 더 높은 단계인 마음을 닦을 수 없다.
마음은 맑은 주인이고 기는 거친 종이니
거친 종이 맑은 주인을 더 맑게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전호흡은 대부분 몸 수행으로 끝나는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닦이지 않은 상태에서
몸이 좋아지니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와 함께 유혼들이 같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행의 결말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늘날 단전호흡 수행단체에서 전하는 진리라는 것들을 살펴보면
하늘의 선인에게서 받았다는 것이 많다.
그 말은 곧 그곳에서 전하는 가르침이
마음을 밝힌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가르침이란 뜻이다.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도는 영은 절대 진리를 전하지 못한다.
영이 범람하는 것은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모든 진리는 마음을 깨친
살아있는 성자들의 가르침에 의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닦는 선정이나 참선과 같은 명상법은
가만히 앉아 생각과 의지만 가지고
마음 속 깊이 내재된 업을 지우려 하니
숙생의 삶을 통해 자신 속에 깊이 얽혀있는 업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모든 접촉을 끊고 고요히 명상에 들어가게 되면
욕망과 집착이 가라앉은 맑은 마음이 나타난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고인 물에 세상이 비치듯 세상이치가 잠시 비치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를 견성했다, 한소식 했다고 하여
크게 인정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그 위에 맑은 물이 괴어 얼굴이 비치는 것과 같아서
다시 세상의 인연이 흔들어 버리면
그 거울은 흐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마음공부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선사가 선정을 하다가 한소식한 후
조금만 닦으면 될 듯하여 폐관칩거하였지만
거의 대부분이 아무런 빛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 것은
실천을 통해 업을 지우려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생각만으로 업을 지우려 했기 때문이다.
주문을 통해 수행하는 방법은
일정한 음을 되풀이함으로써
정신을 통일하려는 것으로 일종의 집중법에 속한다.
이러한 집중법에는 몸의 특정부위에 집중하여
몸의 신비를 개발하려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법으로 몸과 마음의 변화는 있을 수 있겠지만
수행의 핵심인 업을 지우는 효과는 없다.
또한 이러한 방법은 영적 함정이 끼어들 소지가 크다.
주문은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영적 현상에 빠진 후세인들이 지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이치와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순한 음이나 진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율로 이루어진 주문은 신령과 깊은 관계가 있다.
즉 주문은 일종의 주파수와 같아서 주문과 영의 주파수가 일치되면
그 주파수에 맞는 신령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수행단체에서 영에 의한 심령현상이 만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행을 하는 것은 나를 버림으로써
모든 집착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자기의 몸과 세상과의 인연을 버린다고 해서
업이 사라지고 맑은 마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버려야만 하는 번뇌의 바다가 아니라 복을 지을 복밭이며
인생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저주의 윤회가 아니라
완성에 이를 축복의 기회인 것이다.
따라서 나를 버리는 고행을 하더라도
바른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결코 어두운 업을 지우고 밝은 마음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타고난 큰 근기가 없는 사람이 고행을 하면
마음을 닦기 전 몸이 먼저 망가져 버린다.
부처님이 고행을 통해 업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받았던 것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근기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생에 대한
큰 자비와 세상에 대한 강한 사랑이 있어
그러한 안타까움이 자신을 채찍질하여
업을 태울 마음의 불을 지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해서 제시한 수행법들은
삶의 실천을 통해 업을 제거해야 한다는 수행의 요체를 알지 못한 채
지엽적인 관념에 얽매여 형식만 추구했기 때문에
업을 지우지 못해 깨달음을 얻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진정한 수행은 업을 지우는데 있다.
업이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라 지워져 버려야 한다.
일어날 먼지가 완전히 사라져야
어떠한 변화에도 마음거울이 흐려지지 않으며
밤이나 낮이나 앉거나 일어서거나 간에 여일하게 삼매에 들어
세상을 비추고 법을 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업을 지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방법은 오직 자신 속에 있는 진심의 불을 일으켜 태우는 수밖에 없다.
하늘은 인간에게 오묘하고 완전한 은혜를 베풀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맑은 마음과
세상을 자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그 마음을 꽃피우면
완성에 이르도록 하신 것이다.
즉 인간이 맑고 좋은 마음으로 진리를 깨치고 세상을 열심히 축복하면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맑고 선한 마음이 일어나 불이 나면서
애욕과 이기심에 집착하는 삿되고 어리석고 습을 태우고
맑고 순수한 완전한 나를 찾게 되는 것이다.
숙생의 삶을 통해 가슴 속 깊이 엉켜있는 업의 덩어리는
절대 생각이나 명상기법만으로는 지워지지 않으며
진리와 실상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행을 통해
양심과 사랑의 불로 태워야만 제거된다.
즉 끈적끈적하게 깊이 얽혀있는 숙업은
단순히 가라앉혀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불로 태워 완전히 재와 연기로 날려 버려야
다시는 마음자리가 흐려지지 않는 완전한 맑음을 얻어
우주의 근원인 반야의 세계와 합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업을 태우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속을 태울 경우 그것이 집착이 되어
오히려 업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속을 태우는 것과
욕망과 애착에 속을 끓이는 것은 다르다.
속을 태울 때는 업이 사라지지만
욕망과 애착에 속을 끓일 때는 업이 쌓인다.
물론 세상을 위해 속을 태우는 것과 애증과 욕망에 속을 끓이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속이 끓는 것인지 속이 타는 것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속을 끓일 때는
상대가 밉고 증오심이 일어나며 가슴이 아파오지만
실상과 바른 이치를 깨달아 진정으로 상대를 잘 되게 하려고 애를 쓰면
미움이나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아련해지며 열이 난다.
이처럼 미움과 증오심이 없이
속에 열이 나며 몸이 아련해지고 편해지는 것이
바로 업이 타 사라지는 현상인 것이다.
이것이 공덕행에 의한 진정한 수행인 것이다.
우리는 보통 공덕을 세상을 위해 짓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세상을 위해 좋은 인연을 짓는 것을 공덕행이라 하지만
그보다 깊은 의미는
공덕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업을 지운다는 의미가 더 커다.
즉 공덕은 바깥에 쌓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쌓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업을 지우고 맑은 마음을 얻으면
그만큼 그 영혼은 좋아지는 것이며
좋은 선근을 얻어 완성으로 나아가는 선업의 고리를 돌게 되는 것이다.
업을 태우는 마음의 불을 얻기 위해서는
큰 선근과 치열한 실천이 있어야 한다.
숙생의 업을 모두 불살라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을 모두 안는 커다란 사랑과 하늘이 무너져도 꺾이지 않은 용기와
땅이 꺼져도 흔들리지 않은 양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과 용기와 양심이 없다면
그러한 근기를 얻을 때까지 더 많은 생을 돌면서 공덕을 더 쌓아야 한다.
그 공덕이 완성되는 생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인간완성의 열매인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진리의 인연을 찾아 꾸준히 공덕을 쌓으면 살아가는 것이
선업의 고리를 돌며 완성으로 나아가고 있는 인간의 참된 길인 것이다.
자기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숙생의 업을 태울 수 있는 열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진리를 배우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는 정도로는 안되며
하늘이 무너져도 꺾이지 않는 열정으로 세상과 부딪혀
진리를 전하고 실천해야 한다.
세상을 축복하려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딪치고 튕겨 나오는 일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가슴이 애가 타고 열이 일어나 업이 타게 되는 것이다.
있는 일을 보고 그러한 실상 속의 일들과 이치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려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도망가거나 비웃거나 해치려 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 가슴속에 안타깝고 답답한 일들이 쌓이게 되고
이것이 세상 일에 부딪칠 때마다 자신 속에 불을 일으켜
업을 태우게 되는 것이다.
공덕행은 좋은 결과를 낳는 원인을 짓는 것이다.
결과가 나쁘면 공덕도 없다.
사실을 정확히 알고 얽혀있는 악연과 선연의 관계를 명백히 보게 되고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답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으로 살지 말고 사실에 충실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은 좋은 일을 한다고 하는데
이치를 잘못 보아 잘못된 원인을 지으면
그 어리석음이 습이 되어 자신을 어둡게 만들고
잘못된 인연이 자신과 세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절이나 교회에 가고 무조건 남을 돕는다고
공덕을 짓는 것이 아니며
바른 이치로 세상을 축복할 때
자신과 세상이 다 함께 좋아지는 공덕이 되는 것이다.
온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그 대상이 누구여도 관계가 없다.
상대방이 바른 이치로 좋은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그 대상이 누구라 해도 공덕이 되는 것이다.
선한 마음으로 주위에 있는 모든 만물을 잘 되도록 축복하기 위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애태우며 열심히 노력하는 모든 행동이
공덕이 되는 것이다.
가족을 먹여 살기기 위해 매일 일터로 나가
자신을 바치는 가장의 행위도 공덕이며
근면 검소 정직으로 가족의 생계를
알뜰히 꾸려가는 주부의 행위도 공덕행이며
자식이 좋은 인간이 되도록 속을 태워는 것도 공덕행인 것이다.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교훈이 공덕인 것이다.
이것은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인류를 위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위해 속을 태워도 결과는 같다.
사랑하는 대상을 크게 가질수록
큰 사랑을 실천할수록 공덕이 커지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수행의 으뜸인 공덕행으로서
아직까지 세상에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수행의 요체이니
이 법이 흐려짐으로써 진리가 세상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깨달음의 빛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삶과 인간완성의 길은 하나로서
따로 도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비와 사랑없이 하는 공부는 모두 헛공부이다.
그동안 도 공부를 위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불쌍한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마저 버린 수행자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공부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 근본에 큰 공덕과 사랑이 있다면
결코 세상과 중생에 대한 자비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완전한 이치가 있기에
세상을 밝게 하려는 좋은 마음과 중생을 축복하려는 사랑으로
계속 진실을 키우고 업을 지우면
마침내 모든 것을 이치대로 축복하는 완전한 맑은 마음이 영글어
선정을 통해서나, 고행을 통해서나,
사랑을 통해서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누구나 해탈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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