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깨닫기 위한 조건 본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모든 업을 지워야 한다.
반야심경에도 모든 부처는 반야로 말미암아 난다고 했듯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근원의 세계인 반야를 보아야 하는데
이 반야의 세계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나는 근원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 영혼에 조금의 때만 있어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곧 업을 지우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업을 어떻게 지울 것인가?
그 동안 동양에는 진리가 흐려진 관계로
세상을 무명으로 이루어진 환으로 보고
수행을 현실에서 벗어나
별도의 청정한 도를 구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현실을 버리고 홀로 앉아 마음을 관함으로써
마음을 깨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런 명상법으로는
업을 가라앉힐 수는 있지만 지울 수는 없다.
모든 접촉을 끊고 고요히 명상에 들어가게 되면
욕망과 집착이 가라앉은 맑은 마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그 위에 맑은 물이 괴어 얼굴이 비치는 것과 같아서
다시 세상의 인연이 흔들어 버리면
그 거울은 흐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마음공부의 문제이다.
진정한 수행은 업을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지우는데 있다.
일어날 먼지마저 완전히 사라져야
어떠한 흔들림에도 마음거울이 흐려지지 않으며
밤이나 낮이나 앉거나 일어서거나 간에
여일하게 삼매에 들어
세상을 비추고 법을 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업을 지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방법은 오직 자신 속에 있는 참된 마음의 불을 피워
업을 태우는 수밖에 없다.
하늘은 인간에게 오묘하고 완전한 은혜를 베풀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맑은 마음과
세상을 자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으니
삶을 통해 그 마음을 밝히면 그 마음에 불이 일어
모든 때와 어둠을 불살라버리고
완전한 마음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즉 인간이 맑고 좋은 마음으로
진리를 깨치고 세상을 축복하면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 마음이 크게 일어나면서 빛이 나고 열이 나
애욕과 이기심에 집착하는 삿되고 어리석은 습을 태우고
맑고 순수한 완전한 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업을 태워버리기 위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먼저 선근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흠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을 이치대로 부족함이 없이 해놓아야 마음이 편해지는데
이처럼 완전함을 지향하는 맑고 좋은 마음이 인간의 선근으로
맑음과 지혜, 사랑과 자비, 용기와 의지의 원천이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좋은 근본이 있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완성에 이르게 하는데
이를 선근이라 한다.
인간은 이 선근이 커야 업을 태우는 불을 크게 일으킬 수 있어
이생에서 모든 업을 완전히 불살라버리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이생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세상을 모두 안을 수 있는 큰 사랑과
하늘이 무너져도 꺾이지 않은 용기와
땅이 꺼져도 흔들리지 않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랑과 용기와 양심이 없다면
그러한 근기를 얻을 때까지
더 많은 생을 돌면서 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 공덕이 완성되는 생에서
인간완성의 열매인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수많은 생을 통해 공덕을 쌓은 것은
바로 이러한 선근을 쌓아나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생에 나셔서
그 동안 쌓인 큰 근본으로 마지막 남은 업을 불살라버리고
마침내 완전한 해탈을 얻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욕심 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근본이 없음을 안타까워해야 한다.
과수나무도 비바람을 맞고 거친 태양을 받으면서 자신을 키우면
때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니
인간완성의 여정도 선업의 고리를 돌며 열심히 공덕을 쌓다 보면
깨달음을 얻고자 의지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탈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달리 표현하면 선근을 키우는 과정이다.
모든 부처님이 공통적으로 말씀하듯이
모든 좋은 일은 받들어 행하고
모든 나쁜 일은 경계하여 멀리하면
그 근본이 커져 언젠가는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거짓을 버리고 진실해져야 한다.
진실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에 모든 가식과 거짓과 어둠이 사라져
실상과 하나 되어야만 모든 업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두 현실을 구성하는 사실들 즉 진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일들은 모두 환상이며 거짓이다.
그러므로 사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과 거짓을 가까이 하면
그 마음이 점차 어두워져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업이 쌓이게 된다.
깨달음에 있어서 업이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업이 사라진 맑은 마음을 얻어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 업도 지워야 하는 상황인데
거짓으로 새로운 업을 짓는다면
더 이상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없이 살아가는 것은 깨달음의 기본조건인 것이다.
완전한 법계와 이치로 이루어진 우주 속에서
실상과 이치에 따르지 않고 인간의 생각대로 지어내는 일들은
곧 모순과 부조화에 부딪힌다.
따라서 실상과 자연의 흐름에 따라 조금의 거짓없이 산다면
진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으면서도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 한 이유는
그 많은 말씀 중에 생각으로 지어낸 말이 한마디도 없으며
자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고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는 뜻인 것이다.
성자들이 보신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사실 속에 나타나고 있는 진실이며
진실을 구성하고 있는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사람들은 있는 일을 말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환상을 함부로 말함으로써
세상을 더욱 어둠과 거짓으로 물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자기가 분명히 아는 것만 아는 대로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그 말을 듣고 잘못될 사람이 없고 문제가 생길 일도 없다.
잘한 일은 잘한 대로 잘못된 일은 잘못한 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히 알면
속을 사람도 속일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이 이치대로 이루어지는
밝고 공정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맑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은
조선이 망한 이유가 타락한 조선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힌
거짓과 불신 때문임을 통찰하고,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내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니
농담이나 꿈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거짓이 없어야 하며 진실해야 한다.
그래서 여래를 일러 “있는 대로 말하고, 다른 것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 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진리를 보아야 한다.
어두운 세상이다.
지금 사람들은 진리의 빛이 사라진 말세의 어둠 속에서
온갖 거짓과 환상에 오염되어 있다.
현대의 지식들은 대부분
세상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진실과 다른 생각 속의 일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지식이 많을수록
환상과 업이 많아져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 배웠던 모든 알음알이를 버리고
진리와의 인연을 만나 실상을 보는 바른 시각을 얻어
사실 속에 있는 일들을 배워야 한다.
보는 이를 따라 보면 나중에는 세상을 명확히 보게 되지만
환상과 안개 속에 보는 이를 따라 보면
결국 안개 속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치도 어김없는 인과의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에서 진리의 인연을 만나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다.
지난 수천년 동안 수많은 구도자들이
산야를 헤매며 수행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광야에서 쓰러져 죽은 것은
진리의 인연을 만나지 못해 빛이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혼자 허우적거리다 말법에 빠져 인생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의 인연이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 재세시 육친제자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수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분 자체가 완전한 진리였기 때문이다.
진실하고 깨달음 자체인 그 분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똑같이 진리화되어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이후 진리의 빛이 사라져
진리의 인연이 끊기자
다시는 깨달은 자가 나지 못했던 것이니
깨달음의 길을 가려는 자는
반드시 진리의 인연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여러분은 전생에 진리와의 큰 인연이 있어
수천년 만에 다시 희귀한 진리의 빛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 기회를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이 생에서 완전한 해탈로 나아가는
바른 시각과 선근을 마련하기 바란다.
빛 한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혼자서 아무리 더듬거려도 길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길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의 손을 잡고 개울을 건너고 언덕을 넘다 보면
나중에는 손을 놓고 혼자서도
어둠 속을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고 선근을 키우는 과정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장님이 거짓과 환상 속에서 깜깜하게 살다가
밝은 빛을 처음 만나면
오히려 모든 것이 어지럽고 멍하게 느껴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헤아림으로 가득했던
관념적 지식과 거짓된 환상이 사라지고
실상을 비추는 맑은 정신만이 남는 과정이니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며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이때부터는 생각으로 세상일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비친 인과관계에 따라
사실에 맞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전하는 진리는 간단하다.
『이 세상은 완전한 뜻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진리체이며
인간은 그 뜻을 이어받은 신성한 완성의 씨앗이니
지은대로 받는 완전한 법칙에 따라
타고난 양심과 사랑을 꽃피워 열심히 노력하면
바라는 모든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인간완성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참된 진실과 바른 이치가 밝혀지면
세상의 질서와 정의가 바로 서며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저절로 확립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성을 가진 현명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와 생명의 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의 욕망이 아무리 원하더라도
자신에게 손해 되는 업을 짓지 않으며
그것이 진리에 부합되어 자기에게 진정 이로운 것이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받들어 행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러한 완전한 이치와 길이 있기에
깨닫고 살면 밝고 희망찬 세상이 되고
이러한 일을 모르면 그 일이 자기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이치를 깨쳐 세상 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문제 속에 있는 모든 원인과 결과를 보게 되고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이 무지가 모든 악과 불행의 원인이라고 했듯이
바른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이며
진리를 깨우치게 되면 집에 머물며 세상 일을 하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하면서도
사실 그 뜻을 잘 알지 못한다.
무조건 주는 것을 사랑이라 하기도 하고
남녀 간에 서로 좋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며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을 구분해서 말하기도 한다.
철학적인 사람들은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면 사랑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른 이치로 상대가 더 나은 자기를 얻도록
진정으로 축복해주는 것이다.
더 나은 자기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탐욕스러워지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밝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맑고 좋은 영혼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은 법계이며 모든 일은 진리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바른 이치에 따라
상대를 축복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인간에게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조금의 흠과 걸림도 용납하지 않는 맑고 완전한 마음이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옳고 바르고 잘되기를 바라며
불행한 처지에 놓인 경우를 보면
이를 안타까워하며 잘 되도록 도와주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와 옳고 그름을 밝혀 행복해지는 길을 권하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도망가거나 비웃거나 해치려 한다.
사람들이 그런 이유는 어두운 세상이라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고 업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탐욕스런 욕망을 즐기며 살기를 좋아하지
바른 이치대로 성실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
가슴속에 안타깝고 답답한 일들이 쌓이게 되고
점점 그 마음이 달아올라 마침내 마음에서 불이 일어나게 된다.
이 불이 바로 사랑의 불이요, 참된 마음의 불이니
이 불이 자기의식 속에 깊이 짓눌러 붙어있던
숙업을 태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있는 일 속에 있는 좋고 나쁜 일들과 그 이치를
세상에 알리게 되면
사람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지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상대를 올바르게 축복할 수 없을뿐더러
돕는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망칠 수가 있다.
따라서 진리의 인연을 만나
세상을 바로 보는 시각과 선근을 얻어야
바른 공덕을 지어 선업의 고리를 돌 수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도 공부를 위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불쌍한 가족과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마저 버린 수행자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공부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 근본에 큰 사랑이 있다면
결코 세상과 중생에 대한 자비를 버리지 못하며
큰 공덕과 사랑이 있어야만
내면 속에 깊이 박혀있는 숙업을 떨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그 대상이 누구여도 관계가 없다.
상대가 바른 이치로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노력한다면
그 대상이 누구라 해도 공덕이 되는 것이다.
가족을 먹여 살기기 위해 매일 일터로 나가는
가장의 노력도 사랑이며
근면 검소 정직으로 가족의 생계를 알뜰히 꾸려가는
주부의 행위도 사랑이며
자식이 바른 인간이 되도록 애를 태우는 것도 사랑인 것이다.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위해
속을 태워도 결과는 같다.
사랑의 대상이 크고 깊으면 그만큼 공덕이 커지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수행의 으뜸인 공덕행으로
아직까지 세상에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수행의 요체이니
이 법이 흐려짐으로써
진리가 세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깨달음의 빛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에는 용기와 실천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진리를 알고 사랑과 양심이 있어도
용기가 없어 이를 실천하지 못하면
공덕을 쌓거나 업을 태울 수 없다.
어둡고 험한 세상에서 남을 축복하다 보면
여러 가지 한계와 장애에 부딪히게 되는데
용기가 없고 의지가 약한 사람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체념하게 된다.
그러면 업을 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이란 실천을 통해 자신의 근본을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이니
용기가 있어 자신을 이겨내는 실천을 할 때
그것이 마음속에 스며들어 업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완성에 이를 자는
반드시 하늘도 꺾지 못하는 커다란 용기를 지니고 있다.
어떠한 역경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위한 사랑으로 끝없이 자신을 불사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인간완성과 해탈지경이 찾아오는 것이다.
진리가 눈앞에 있을 때
항상 발가벗을 수 있고 자신을 모두 내던질 수 있다면
진리와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깨달음과 일체화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2%가 부족하여
자신을 완전히 진리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낸다고
벽창호같이 무조건 들이 밀어서는 안된다.
살인마의 손아귀에서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강도야!” 하고 소리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
좋은 결과가 없다면
그것은 사실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인 것이다.
진정한 용기는 사랑과 지혜로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거두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일을 잘하기 위해서도 진리의 인연을 만나
세상을 보는 시각과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
성자들이 일을 잘하는 이유는
그 마음이 맑아 세상을 정확히 보며
사물의 인과관계를 보아 분명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쉬지 않고 좋은 원인을 계속 짓기 때문이다.
따라서 끝없이 인내하고 준비하여 성공할 확률이 서면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과감히 실천하면
반드시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깨달은 이는 이런 말을 하셨다.
『참된 진실과 바른 이치를 1년 배우게 되면
자신이 실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2년 배우게 되면 세상일의 실상과 옳고 그름을 구분하게 되고
3년 배우게 되면 양심과 용기가 커져서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지 않고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수많은 윤회를 거쳐 과거의 삶 속에서 지은 업은
반드시 현실의 삶을 통해 지워야 하는 것이다.
완전한 인과의 법에는 공짜가 없다.
땅으로 넘어진 자는
반드시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숙생의 삶을 통해 가슴 속 깊이 엉켜있는 업의 덩어리는
절대 생각이나 명상만으로는 지워지지 않으며
진리와 실상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행을 통해
양심과 사랑의 불로 태워야만 제거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모르고
어떻게든 빨리 깨닫겠다는 얕은 생각으로
각종 수행비법으로 요령을 부리고 노력하지 않고
마음만으로 업을 지우려 했기 때문에
헛되고 어리석은 거짓된 깨달음의 길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수행은 삶 속에 있어야 한다.
삶과 유리된 것은 형식적인 삶일 뿐 참된 인생이 아니다.
우리는 좋은 원인을 지으며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났지
명상이나 기와 같은 관념적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닌 것이다.
수행자들은 이제 삶과 수행을 따로 보는
잘못된 관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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