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의도된 행위와 업 본문
선업도 업이고 악업도 업인데 의도된 행위로 어떻게 공덕을 쌓으며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이 올바른 질문이 되기 위해서는
과연 선업과 악업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이며
해탈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진실인지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에서는 악업도 업이고 선업도 업으로
업을 짓는 것은 모두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즉 악업으로 아귀, 축생, 지옥에 나던 선업으로 인간세상이나 천상에 나던
모두 생노병사의 끝없는 굴레에서 돌고있는 고해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분별을 버리고 선업도 악업도 짓지 말고
선정으로 모든 것이 환이며 공임을 깨쳐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해탈을 이루어야
비로소 나고 죽는 생사의 윤회 굴레에서 벗어나 생사윤회를 영원히 단절하는 평안에 든다고 합니다.
즉 불교의 목표는 단지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삼계윤회를 뛰어 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우주의 본질을 공으로 보고
이 세상을 환상과 착각이라고 보는 힌두 브라만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논리로서
부처님이 밝히신 정법이 아니며 세상의 진실도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과 같이 늘상 우리주변에 있는 일로서
누구나 사실로 확인할 수 있는 이치이니 너무나 쉽고 상식적이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은 눈앞에 보이는 명확한 인과관계로 나타나며
항상 자연을 비유로 들어 이치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자연 속에 세상의 진실이 있고 이치가 그대로 나타나 있으니
자연의 실상과 이치에 맞으면 그것은 곧 부처님의 말씀이요, 진리인 것이며
그렇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실상이 아니고 거짓이며
세상을 이루는 진리가 아닌 꾸며진 진리이며 성자의 말이 아닌 것입니다.
자연을 살펴보면 정성들여 농사를 지으면 풍년이 오고
씨만 뿌려놓고 기도만 하면 흉년이 오며
인간이 진실하게 살면 마음이 맑아져 완성에 이르고
거짓되게 살면 어둠고 불행 속에서 소멸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법이며 불법인 것입니다.
즉 좋은 원인을 지으면 세상에게도 좋고 인간에게도 좋으며
좋은 선근을 얻어 아라한과를 이루고 천상에 이르며
더 큰 공덕을 쌓으면 마침내 해탈하여 부처의 과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은 행하고 모든 악은 멀리한다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이듯이
좋은 원인을 인연으로 세상과 인간이 평안하고 완성된다고 하는 것이
간단 명확한 부처님의 인과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깨달음의 지혜가 사라지고
세상을 보지 못하는 중생들의 흐린 생각 속에
논리와 관념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말법이 불법 속에 스며들다 보니
원인이 모여 결과가 되는 명백한 인과법이 흐려지고
간단한 눈앞의 일이 복잡해지고 사변적이 되어 불교가 현실과 맞지 아니하고 생명력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불교는 매우 복잡합니다.
윤회가 있다는 견해도 있고 없다는 견해도 있고
선업을 지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버려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업을 실어나르는 영혼의 주체가 있다고 하기도 하고 없다고 하기도 하고
공덕행을 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필요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법은 오직 하나일 뿐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매해진 이유가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정법 500년 상법 500년을 거쳐 말법시대에 접어들어 정법이 애매해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 낙원같은 삶을 살아도
점차 탁업이 번져 다시 말세가 와서 변화기를 맞아야 하고
정법이 나타나도 그 속에 점차 인간의 생각이 끼어들어 다시 말법화되는 것이
세상의 자연스런 흐름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종교를 성자들이 가르친 진리 그대로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 아는 것이며 현명한 판단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은 선업을 분명히 밝혀도 공덕을 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 불교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세상 자체가 거짓된 환이라고 하니
열심히 현실을 개척할 사람이 없는 무기력한 종교가 되어 버리고
허황한 관념놀이로 변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실적으로 보자면 그동안 부처가 난 후에
업이 정지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이는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이며
업을 모두 지워 깨달음에 이른 성자는 부처님 이후 나타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불교는 업이 정지되어 천상에 나는 희귀한 아라한의 경지도 우습게 보고
아무도 이른 적이 없는 부처의 경지마저 누구나 막바로 이를 수 있다고
너나 나나 다 깨쳤다고 하니 현실적 실천력은 없고 말만 많은 위선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불교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종교가 된 근본이유는
선업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말법이 불교 속에 들어와
깨달음은 공덕과 무관하게 선정을 통해 깨치는 것이라고 오도했기 때문입니다.
칠불통계에 보듯이 선업의 인과는 세상을 살리는 기본이치로
선업과 천상에 나는 것과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밀접한 인과관계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선업을 열심히 지으면 마음이 밝아지고 좋은 선근을 얻어 그 공덕으로 천상에 나게 되고
이러한 선근을 바탕으로 다음 생에 나면 더 큰 공덕을 지어 부처의 과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 부처님이 걸어가신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그런데 말법이 이것을 오도하여 선업도 악업도 소용없고 허망한 분별심이라 왜곡하자
불교의 영향하에 있는 나라는 좋은 원인을 짓는 이가 적어지고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아
결국 어둡고 불행한 운명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념적 논리가 오늘날 불교의 대세로 자리잡고 있기에
오늘날 불교가 생명력이 사라졌으며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과 인과를 부정하는 공사상은 부처님의 정법을 망치는 말법입니다.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공사상이 들어와 대승불교를 성립하면서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이며 삶의 실체적 요소로 간주되었던 다르마(法)를 부정하고
유정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꿈이나 환과 같으며
부처님의 깨달음마저도 하나의 차별관념에 불과하자
부처님의 사실적인 인과법을 지켜오던 소승불교계에서는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대승경전은 소설가의 잡설에 불과하다고 부정하였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실적인 법을 이어받은 설일체유부에서는
공을 주장하는 중관학파를 ‘도무론자(都無論者 : 모든 것이 무라고 부정하는 자)’라고 하였고,
경량부는 세친의 〈구사론〉이나 그에 대한 경량부 주석서를 통해
‘일체의 법체가 모두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일체가 없다는 집착’에 빠져 있다고 하였으며
인도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스리랑카 상좌부에서도
중관학파를 대공부(大空部)라 하여 이단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쉽게 넘겨버려서는 안됩니다.
역사와 법통을 가진 거대한 기존 교단에서 새로운 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대승의 교리가 기존에 배워온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점이 많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니
지금 그대가 진리로 생각하고 있는 관념, 즉 선악의 구별이 없으며
해탈은 선악의 분별을 뛰어넘어 모든 것이 공임을 깨우치는 것이라는 관념을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불교는 악업으로 아귀, 축생, 지옥에 나던 선업으로 인간세상이나 천상에 나던
모두 생노병사의 끝없는 고해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고
선업도 악업도 짓지 말고 모든 분별을 버리고 삼계윤회를 뛰어 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해탈한 자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에 대해서 무기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해탈한 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논리는
부처님을 여래라고 하는 뜻을 살펴보아도 맞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래(如來)라는 말은 돌아온다는 뜻으로 같은 부처가 온다는 뜻이니
해탈이라는 것이 이 세상을 떠나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에 있어서도 부처님은 과거 생에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가 이생에 와서 완전한 정각을 이루었다고 했으며
이곳에서 스승으로 모시는 이삼한 성자도 이미 과거생에 깨달음을 얻어 천상에 머물다
이 세상을 변화기의 운명에서 구하는 사명을 갖고 다시 돌아왔다고 했으며
자신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공덕으로 타고난 모든 업을 모두 지우면
조물주가 머무는 창조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해탈한다는 것은 오고 감이 자유로운 상태이지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떠나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하면 즉 적멸의 세계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것을 그토록 오랜 시간 수많은 생을 돌며
공덕을 쌓아 완성에 이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으며
해탈이라는 경지도 이 세상사람들이 그토록 이르려고 갈망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적멸이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무라는 것인데
부처님 법에서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무를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 사이에 흐르고 있는 이치와 진실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을 전하는 파를 설일체유부(모든 있는 것을 설명하는 파)라고 하듯이
부처님 법은 인과법과 세상의 실상 뿐만 아니라 깨달음마저도 유적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반야 또한 인식할 수 없는 경지일 뿐이지 절대 무가 아닙니다.
따라서 선과 악의 인과를 떠나 영원한 사라지는 적멸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적멸이란 영원한 무이며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기에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맑고 가벼운 영혼을 얻어
오욕에 범벅이 된 불행한 운명의 탁한 욕계를 벗어나
고요하고 평안한 높은 천상의 차원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유적 존재이고 영원한 것은 없으니
천상에 머물더라도 그곳에 영원히 머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언젠가는 기운과 인연이 쇠하여지고 순환을 통해 다시 나야만 자신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상에서 나서 완전한 해탈을 이룬 부처도 우주의 근원인 불성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히 적멸의 상태에 머물며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근원으로 돌아가 적멸로 머문다면 영원히 적멸로 계속 머물지
오늘날과 같이 법계라는 세상을 창조하여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창조의 영역인 불성은 다시 이 우주로 자신을 나타내었으며
부처님도 다시 여래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순환을 통해서만 자신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도 마찬가지이고 성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존재는 정지할 때 죽음이 시작되고 움직임으로써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집이나 배도 사람이 사용하지 않으면 급속히 상하기 시작하며
사람도 할 일이 없으면 스트레스가 생기면서 생명력을 잃고 병이 나게 되는 것이니
살고자 한다면 움직이거나 순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불성 또한 고요가 아니라 움직임 속에 있는 것이니
평온한 안녕이 아니라 움직임 속에서 질서와 완성을 이룸으로써
불성은 자신의 완전함을 영원히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주의 근원은 고요에 머물지 않고 움직여
다시 씨앗을 낳고 지은대로 받는 완전한 이치를 통해
잘 지은 것은 열매에 이르게 하고 잘못 지은 것은 소멸하게 하여
모든 것이 이치대로 이루어지는 완전한 세상을 움직임 속에서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요 속에 존재하는 완전함이 아니라 움직임 속에 존재하는 완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풀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순환하는 이유이며
탁함을 멀리하고 맑음을 가꾸어야 하는 이유이며
악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지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과를 부정하고 순환을 부정하고 선악을 부정하는 공법은 더 이상 주장하지 말기 바랍니다.
공사상이나 힌두교에서는 우리의 눈앞에 실재하는 우주마저 존재하지 않는 착각이며 거짓된 환상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세상을 있는 실재로 보는 부처님의 유법과 모든 것을 환이라 보는 공법과의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쟁점은 과연 부처님이 선업과 악업을 분별하지 말고 선업을 짓지 말라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선과 악, 친해야 할 것과 친하지 않아야 할 것,
정법(正法)과 사법(邪法), 연기법(緣起法)과 외도의 법(非緣起法)등을
옳고 바르게 사실대로 아는 것을 올바른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사실대로 보고 이치대로 이루어지는 밝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인간의 길은 무엇이며 해탈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를 바로 보아야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나
바른 공덕을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눈은 한꺼번에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의 인연이 있는 자만이 세상을 보는 눈을 얻게 됩니다.
진리의 인연을 만나면 장님의 시각을 벗고 깨달음의 눈을 얻기 위해 하나 하나 깨우쳐 나가야 합니다.
이 생에서 하나를 보면 다음 생에도 하나를 보게 되며 두 개를 보면 두 개를 보게 됩니다.
깨우친 시각은 모태법에 의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과거 생에 아라한에 이르렀다고 이생에 와서 부처의 과를 이룬 이유도
전생에 진리의 인연으로 수많은 공덕을 쌓아 세상을 보는 지혜와 선근이 가득하였고
이 생에 와서 자신이 지니고 나온 맑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남은 업을 마지막으로 지워버려 해탈심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세상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이 보이면 세상을 가장 올바르게 축복할 수 있는 지혜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 공덕이 무엇인지 무엇이 선업인지 왜 공덕행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니
세상을 보게 되면 공덕행을 하지 않으려 해도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진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바로 이러한 실상의 일들과 불변의 이치를 설한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만이 진실이며 진리인 것이니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 속에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세상의 흐름과 일치하여 살아가면
가장 조화롭고 올바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바로보고 세상의 뜻에 따라 흐름에 부응하여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 가장 참되고 가치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속에 존재하는 사실을 공이며 환이라 하고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고 있는 불변의 법칙인 인과법을 부정하니
어찌 세상을 바로 보고 좋은 원인을 지으며 공덕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어두운 세상에서 진리의 길을 간다고 애를 쓴 것이
오히려 말법의 인연을 만나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으니
오욕에 빠져 살아가는 일반사회인보다 시각이 더 우둔해진 것이
오늘날 수행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눈인 것입니다.
세상을 보지 못하니 가만히 앉아 깨달음을 얻으려 하고
선과 악의 구분을 없애 자신과 세상을 망치는 어둠의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선업은 무엇이고 악업은 무엇인가?
선업은 세상의 일을 밝혀 이치대로 실천함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고 세상에 공덕을 짓는 것이며
악업은 세상의 일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욕심대로 함부로 살아
정신을 흐리게 하고 세상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계는 빛과 어둠과 같아서 서로 다른 유형의 반대되는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밝음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고 어둠이 짙으면 밝음이 숨을 쉴 수 없는 것과 같이
악업은 업을 짓는 것이며 선업은 업을 지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업을 지으면 중생의 운명을 받아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밝고 강한 선근을 얻어 악업에 물들지 않고 모든 것을 사실과 이치에 맞게 행하는 관계로
공덕이 쌓여 선과의 고리를 돌아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과의 고리를 도는 자는 만나는 세상이 모두 축복이며 기회의 복밭이니
부처님의 육친제자들은 다음 세상에는 부처의 과를 얻게 된다는 축복의 수기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선업마저 업으로 해석하여 선업마저 짓지 말아야 한다는 함부로 말하는 것은
말법에 의해 오도된 현대불교의 치명적 병인 것입니다.
선과 악의 구별을 부인하고 세상을 허망한 공으로 보는 관념과 논리에 의해
무위공덕 유위공덕을 구별하고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남에게 베풀었다는 마음을 갖고 하는 공덕은 선업을 짓는 공덕이므로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공덕을 베푸는 보시를 진정한 공덕이 되는 보시라는 것입니다.
즉 아무 이유도 없이 주는 보시이며 오른손이 행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보시하는 것이
무위공덕이며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의 유희이며 말장난입니다.
의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행한 것을 아무런 자각없이 모르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무런 뜻과 이치없이 행하는 보시와 공덕은 자신을 무지하게 만들어
자신과 세상을 망치게 됩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준 다음 그 용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것이니
받는 사람에게는 이것보다 편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복지역사를 살펴보면
전쟁후 고아원이나 복지시설, 종교시설을 운영한 자치고 부자가 안된자가 거의 없었으며
불우이웃돕기 성금이 제대로 쓰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인과는 지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본인이 의도하든 않든 관계가 없습니다.
인과는 본인이 알던 모르던 지은대로 세상에 그대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치에 맞게 좋은 원인을 지어 상대도 좋고 세상도 좋고 나도 좋는 공덕을 짓는다면
본인이 의도하던 않든 간에 좋은 공덕을 지은 것이니
복잡하게 말을 만들어 의도하면 업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말법이 생각 속에 만들어낸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입니다.
자신이 행한 일이 공덕이 되기 위해서는 그 전후관계를 잘 알아 세상에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잘 알고 세상을 축복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밝게하여
다음 생에도 좋은 근본을 갖게 하고 밝은 시각을 갖게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을 어둡게 하고 상대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러한 행위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어리석은 자신과 불행한 세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대는 늘상 말하는 이론 즉 진리니 이치니 그런 말말고
실생활에서 적용할수 있는, 적용되는 쪽으로 말씀해 달라고 했습니다.
장님이 무지개 색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고 해서
무지개 색을 아무리 일러주어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눈을 뜨지 않는 한 결코 무지개 색을 볼 수 없습니다.
이곳에 수년간 있는 분들이 이제 가까스로 이병철의 질문에 조금씩 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보지 못하면서 공덕을 짓는 길을 보여 달라는 것은 욕심일 뿐입니다.
세상을 보기를 원한다면 지금 그대의 머리 속에 가득 담겨져 있는
그동안 중생들이 생각 속에서 만들어놓은 지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진리 속에 있는 이치와 세상의 진실을 하나 하나 깨우쳐 나간다면
어느 순간부터 세상을 보게 될 것이며 혼자서 어둠 속을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최근에 적은 자유게시판의 글을 참고하시면
그동안 세상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불완전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635번글 [re] 정의, 양심, 인간의 길, 깨달음의 길은 하나
639번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허해구님 저도 나름 진리의 진실에 눈을 뜨고 싶어 헤메던중 이곳에 오
>
>게 됏는데 .. 공덕행만이 꺠달음을 얻을수 잇다고 하셧는데 제 생각은 불교에서
>
>업을 짓게 되는 원인은 의도된 행위 를 할 경우 업을 쌓는 것으로 알고 잇습니다
>
>물론 님이 말씀하신 공덕행을 하면 좋다고는 생각하나 이것이 꺠달음을 가져올지는
>
>의문이군요 제가 궁금한것은 님이 생각하시기에 공덕행이 업을 쌓게 하는 즉 "의도
>
>된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싶습니다 선한 행위든 악한행위든 의도된
>
>행위는 업을 쌓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머 기왕이면 의도된 선한 행위를
>
>하는게 낫겟지만요 님이 늘상 말씀하시는 이론 즉 진리니 이치니 그런 말씀말고
>
>실생활에서 적용할수 있는 , 적용되는 쪽으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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