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능엄주 본문
먼저 능엄주나 다라니같은 것이 영험한 효과가 있는가? 물었습니다.
영험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내가 별다른 원인을 짓지 않았는데도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며
알지 모르는 힘이 나를 돌보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세상은 완전한 법계로서 이치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으면 지은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짓지 않고 모든 것이 잘되며 복 받기를 바라는 영험하다는 말 자체가 정법이 아니며
무지한 어둠 속에 헤매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우연히 <능엄신주>를 읽게 되었는데 효험이 있다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개인 수행의 방편으로 능엄주를 읽어도 되느냐를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능엄경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능엄경은 부처님의 진경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진경은 초기에 나타난 아함경과 같은 초기경전 뿐입니다.
그곳에는 살아생전 부처님이 제자들과 다니면서 평생동안 하신 말씀과 행적이 그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부처님은 육사외도(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과 자재천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는 창조론,
지수화풍 같은 물질요소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유물론, 진리라는 것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론 등)와 같은
말법이 어지럽게 번지고 있는 혼탁한 인도사회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한점 티끌없는 맑은 마음과 삼세를 보는 눈을 얻어
우주의 실상을 보고 그 속에 흐르는 이치를 밝힘으로써
세상사람들이 사실과 부합된 참된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불행과 고통이 없고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히 알고
세상을 이루는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은 없습니다.
세상에 분명히 있는 일은 진실이니
이에 근거하여 가르치면 참된 진리가 되는 것이며
세상에 없는 환상이나 이치에 어긋난 그릇된 말을 가르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짓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비법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사실을 사실대로 본 것이며 그 가르침은 사실과 일치한 진리였기에
중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라 하고 부처님을 정각을 이룬 성자라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시 브라만교의 환상과 미신, 육사외도의 관념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둠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셨고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영원한 법칙을 가르침으로써
무지와 삿된 욕망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실상을 보는 완전한 시각 앞에
장님들이 관념으로 펼치는 환상의 지식들은 그 어리석음과 허황됨을 드러내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법으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요체는 우주의 참된 실상과 인과의 법칙, 세상을 축복하는 좋은 마음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고 인과의 이치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에 따라 좋은 원인을 지으면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좋은 원인을 지을 수 있고 좋은 결과를 얻어
지상극락을 이루고 인간완성인 해탈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해탈심에 비친 실상과 이치는
이 세상이 하나이고 이를 구성하는 진리도 하나이므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똑 같습니다.
부처님은 논리로 이치를 만들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사실과 그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이치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함경에 여러 장소에서 같은 말을 한 구절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같이 항상 같은 현상 속에는 언제 어디서나 같은 이치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참된 말만 하며, 사실만을 말하며, 진실만을 말하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으며, 사실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에게 있어 이 세상은 우주의 진리가 나타나 있는 실상의 경전으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그대로 완전한 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자연이야말로 진실이며 세상의 모든 법이 나타나있는 가장 위대한 경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초기의 말씀을 기록한 숫타니파타와 법구경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경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단순하며 명확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해지고 있는 초기의 아함경이라는 것도
불멸후 200-300년경에 최종적으로 집필되어서 많이 신비화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즉석 의사소통시대에도 한두사람만 건너가면 말의 요지가 뒤바뀌는데
그 당시 교통이 불편하고 10여세대가 입으로 구전한 후 만들어진 아함경이
어찌 부처님의 정법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아함경이 부처님의 정법에 가장 가깝지만 그 속에는 많은 가필이 되어 있어서
많이 읽으면 뜻이 헷갈리며 많은 혼동이 옵니다.
아함경이 이럴진데 어찌 불멸후 500년 이후에 나타난 대승경전이 정법일 수 있겠습니까?
현재도 불교 속에는 육사외도의 관념들이 다시 나타나 부처님의 정법을 흐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이 업설과 연결되어 불교계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고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같이 관세음보살과 부처님에 대한 신앙과 주문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인은 그 이후에 힌두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대승경전의 영향 때문입니다.
님이 말하는 능엄경도 대승불교 중에서도 가장 늦게 나타난 밀교계통의 경전입니다.
대승경전 가운데 제일먼저 출현한 것이 반야경계의 경전으로 불멸후 4,5백년경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고
불멸후 6백년경에 법화부가, 화엄부의 경전은 불멸후 7백년경에 차례로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밀교계통의 경전인 능엄경은 7-8세기에 대승불교의 화엄(華嚴)사상 ·중관파(中觀派)·유가행파(瑜伽行派)사상 등을 기축으로 하여
중국에서 도가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는 말이 정설로 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능엄경의 다라니와 같은 주문도 초기 불교에는 없었던 사항인데
부처님 사후 약 600년이 지나 정법이 흐려지고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가 성립하면서
힌두신에 대한 신앙사상과 힌두 주문이 불교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대승불교는 기존 소승불교의 귀족성을 극복하고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기 위해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믿음사상인 박티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시켜 나갔고
중생들이 쉽게 구원의 평안을 느낄 수 있는 방편으로 힌두교에서 널리 사용되던 진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언은 mantra의 의역으로 본래는 베다의 주문을 일컫던 말로서
보통 내용이 긴 것을 다라니, 짧은 것을 진언이라고 하며 범어를 원문 그대로 외웁니다.
따라서 이러한 대승불교와 주문들은 초기의 정법과의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밀교에 대해서는 새글 게시판 99번글 밀교의 형성과 불교의 소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그대가 말한 능엄경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쓴 경이 아니라 일종의 명상서적으로서
부처님의 정경이 아니라 외경 내지는 위경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능엄경에는 수행으로 해탈에 이르는 과정에서 다가오는 50가지의 마장을 제시하면서
갖가지 수행의 증험과 경계해야 할 일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양신을 거쳐 신선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선도서적들처럼 수행에서 겪는 갖가지 경지는 있는데
실상에 대한 깨달음과 인과법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경을 쓴 사람은 해탈에 이르러 실상을 보지 못하고
평생 수행만 하다가 갖가지 영적 체험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평생 진실을 밝히는데도 시간이 부족했는데
자신이 부정한 명상 수행법에 대해 그렇게 상세히 설명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깨달음은 그러한 고행이나 수행에서 온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으로 쌓은 공덕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앉아서 백년을 수행하는 것보다
진심으로 깨우치고 실천하여 자신의 업을 하나 태워버리는 것이 더 큰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밝혔듯이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그 속에는 한치의 어김없는 인과법이 흐르고 있어
현실 속에는 그 일을 있게 한 원인과 미래의 일을 있게 할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과의 법을 보게 되면 풀지 못할 일과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며
사실에 충실하게 바른 원인을 쌓아 나가면 반드시 좋은 세상과 인간완성의 결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법계에 지어져있는 하늘의 완전한 뜻이며 참된 인간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불교는 이러한 이치가 사라지고 말법에 휩싸여 환상과 무지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말법이 번지면 온갖 어지러운 말들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는 너무나 간단하며 법은 명확합니다.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짓는대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말들과 방법은 모두 정법을 어지럽히는 사법입니다.
따라서 과감히 이치에 맞지 않는 모든 거짓과 환상을 벗어버리고 명확한 진실을 받아들일 때
사실적인 눈으로 바른 눈과 넘치는 생명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불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화려한 수행법이나 주문을 버리고
초기의 가르침인 인과의 이치와 팔정도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정법인 것이며 우리들이 의지하여 살아가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그냥 능엄주를 읽어보았는데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럴수도 있는 것이 주문은 죽은 자와 약속된 언어이기에 그 자체에 영적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문을 외우게 되면 여러 가지 영적 현상과 신기에 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주문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인과의 법만을 밝혔던 것입니다.
주문이 인과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주문을 외워보면 압니다.
주문이 올바른 진리라면 누구든 그것을 외우면 다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반응이 오고 어떤 이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주문에는 영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산 사람은 죽은 기운과 휩쓸려서는 안됩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좋아하는 주문을 자꾸 외우면 생명의 길을 잃어버리고 영적 길로 빠져듭니다.
죽은 자가 찾아오면 산 사람에게는 생명력이 약해지고 삶이 어두워집니다.
주문에는 아무 뜻도 이치도 없습니다.
뜻없는 곳에는 진리가 자리할 곳도 없습니다.
세상의 일은 인과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뜻이 없는 주문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문으로 하는 일이 좋아질 것 같으면
씨만 뿌려 놓고 가만히 앉아 주문만 외우면 풍년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에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은 비법이며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님은 기도니 주술이니 하는 신비적인 원력으로
재난에서 벗어나려는 미신적인 수단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중아함경] [장아함경] 및 [사분율] 등에 의하면
부처님은 처음에 제자들에게 세속적인 주술법을 행하는 것을 엄금하고
위반자는 파일제(payattika : 지옥에 떨어지는 죄)를 범한다고 하였으며
또, 팔리어 경전 소품의 소사편 제5에는 세속의 밀법들을
축생의 학(tiracchana -vijja)이라고 표현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정법에 위배되는 파일제가 오늘날 불교의 기본교리로 채택되어 유행하고 있으니
그 말법성을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간혹 주문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느끼고 가피를 입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에 없는 일을 부처님이 도와주는 일이 없으니
그런 일들은 대부분 유혼의 장난에 의한 것입니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면서 영적 장난을 일으키는 성령이나 보살의 위신력은
모두 진리의 거대한 흐름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장난질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라니를 하면 무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에 집중하여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모으는 것과
아무 의미가 없는 주문에 집중하여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주문은 죽은 자와의 약속 같은 것이어서
주문으로 정신을 놓아버리면 그곳에 죽은 자의 영혼이 들어오게 됩니다.
죽은 자가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오면
그 사람의 의식이 잠자고 죽은 자의 의식이 대신하게 되므로
그 사람은 수면상태처럼 평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몸을 유혼에게 바치고 자신은 뒷방 신세를 지는 것과 같은 것이니
종교를 믿어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을 느끼는 것은
대부분 이와 같이 영들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여 마취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안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세상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기 때문에
세상에 돌아오면 더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며
이를 잊기 위해 다시 종교로 도피하는 것이 종교 속에 내재되어 있는 중독원리입니다.
세상일은 한치의 오차없는 인과관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모든 일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신의 마음 속에 쌓인 업을 닦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기간 동안에 바른 이치를 배우고 진리를 깨우쳐
좋은 공덕을 행하는 인간농사를 지음으로써
더 맑은 마음과 밝은 지혜와 강한 의지를 지닌 좋은 자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삶을 통한 인간 농사를 짓지 않고 가만히 앉아 다라니만 외운다고 해서
수생동안 쌓인 자신의 업이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의 업이란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삶 속에서 행했던 습이 쌓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삶을 통해서만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반드시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 영원불변한 인과법인 것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생기는 것은 태초부터 불변하는 완전한 진리입니다.
이런 이치를 분명히 인식해야 삶에 어둠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치에도 없는 그럴듯한 환상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니
세상이 어둡고 사람들의 삶이 불행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것보다
바른 이치로 올바른 원인을 짓는 인간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인간의 길은 하나의 깨우침이 있어야 그만큼 좋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주문에 빠지는 것보다 세상의 실상과 바른 이치를 배워야 합니다.
다행히 님은 진실의 근원과 인연이 닿았으니
이곳 매일 오셔서 그속에 있는 완전한 이치와 뜻의 세계를 보시도록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이곳에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맞게
삶의 다양한 현상 속에 깃들어 있는 뜻과 이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
>다름이 아니고 제가 한번은 방에서 자고 있을 때 5~6일간 연달아 악몽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능엄신주>를 읽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다음날부터 제 방에서 잘때 악몽을 더이상 꾸지 않게 되었습니다.
>
>물론 저는 능엄신주가 악몽이나 악귀를 쫓아낼거라고 인식을 못한 상태였구요
>이걸 읽으면서 악몽 그만꿔라 하고 자기최면같은 것도 걸지를 않았습니다. '그냥'읽어봤어요.
>
>여기 사이트에 글 읽다보니까 주문이나 다라니는 소원들어달라고 염원을 실어서 하면 돌아다니던 다른 영을 불러들인다고 하지 말고 그냥 좋은 원인을 지으라 하셨는데
>
>다라니나 주문같은 것은 어지러운 생각을 차단하는데 많은 효험이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스님들도 많이 하시는 것 같구요
>뭐 음파의 공명을 이용하는 것이다. 어쩐다하시더군요..
>
>그렇다면 제가 이 주문을 수지독송함으로써 잘될것이다. 신장님이 내려와서 다 물리쳐줄것이다
>영능력을 갖고싶다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고 그냥 하루에 한 편씩 잡념을 다스리는 방편으로만 읽어도 될까요?
>전 겁이 많아서 영안이 뚫리고 뭐 보고 전생보고 미래보고 하는 것은 필요없구요. 돈 욕심도 없어요.. 이성에게도
>별 관심없고.,,,,
>
>궁금한점은
>
>1. 능엄주나 다라니같은 것이 영험한 효과가 있는가
>2. 어떠한 것을 전혀 바라지 않고 개인 수행의 방편으로 무념무상으로 그냥 읽어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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