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관의 무지함 본문
수행을 하여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무분별지를 주장하며 선과 악의 구별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소위 세상이 환이며 선업과 악업이 모두 윤회의 씨앗이라는 공관을 깨우쳤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말법의 무서움을 느낀다.
잘못된 배움이 오히려 인간을 더욱 무지몽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처님을 깨달았다고 한다.
깨달았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보는 눈을 얻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실상을 보는 눈으로
세상은 법계이며 완전한 인과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어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이
“諸惡莫作(제악막작) 모든 악을 짓지 말고
衆善奉行(중선봉행) 온갖 선을 행하라!” 인 것이다.
이러한 인과법이 왜 어지러워졌는가?
그것은 바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공철학을 기본으로 한 대승불교가
우리 사회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힌두교와 대승불교에서는 공과 마야(환)철학을 근본으로 하여
우리의 눈앞에 실재하는 우주마저 존재하지 않는 착각이며 거짓된 환상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모든 분별을 벗어나고 선업과 악업을 벗어날 때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불교는 사실적인 시각을 잃고 관념화 되어버린 것이다.
현실에 대한 사실적 시각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한 체념적 달관을 마치 도를 깨친 듯 착각하는 말법에 빠져
자신의 생명의 종자마저 까먹고 있는 것이다.
인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원인과 결과를 보지 못하고
되는대로 살아서 무엇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밀하게 전개하던 불교의 부파를 “설일체유부”라고 한다.
즉 불교의 초기 가르침은 관념적 논리나 신앙에 기초한 다른 종교와는 달리
존재하는 실상에 기초한 사실적인 가르침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실을 사실대로 본 완전한 깨달음의 시각이었으며
과학적 진리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치대로 살면 헛됨이 없고 모든 것이 법대로 이루어져
그 가르침을 영원한 진리로 존경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사실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실 속에 존재하는 현상들과 그 이치를 알면
세상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연기법으로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무위법 또한 하나의 존재하는 유적 형태였으며
부처님의 해탈심 또한 공덕의 인과로 나타나는 하나의 유적 존재였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법(法)이라는 것은 삼세(三世) 어디서나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법의 흐름이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공관이 들어오고 대승화됨으로써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히 보고 인과의 이치를 밝히는 부처님의 유법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환으로 보고 분별심마저 버리는 어리석은 말법이 성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선과 악, 친해야 할 것과 친하지 않아야 할 것,
정법(正法)과 사법(邪法), 연기법(緣起法)과 외도의 법(非緣起法)등을
옳고 바르게 사실대로 아는 것을 올바른 지식이라고 했다.
다른 곳에서 선악의 구별이 없다고 말하면
대단한 경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을 정법으로 보는 이곳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자를 말법에 빠져 자신과 세상을 망치는 가장 어리석은 자로 본다.
그 증거는 오늘날 수행한다는 사람들이
일반인보다 세상물정을 더 모르고 관념적이 되어
세상에서 도태되는 흐름에 포함되고 있음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선악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자기 눈앞의 일도 알지 못하는
허황한 관념에 빠진 사람은
향후의 세상에서도 지금의 시각 밖에 보지 못하기에
세상을 정확히 보지 못하고
우매하게 살아가는 나약하고 불행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를 부정하고 선악을 부정하는 공관의 말법을
자기 만이 유식한 듯이 더 이상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분들은 그러한 한계를 이미 경험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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