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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근원

달마 대사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gincil 2018. 8. 7. 12:10

양무제의 “무소공덕”이라는 고사 속에 실상에 대한 진실이 있다.


있는 일 속에 진실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실 속에서 이루어진다.


부처님은 사실 속에서 나타나는 진실을 밝힘으로써 사실과 다른 어둠과 미신을 제거하고 세상을 축복하려고 하신 것이다.


씨만 뿌려놓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닌 것이다.


사실로 나타나는 세상 속에서 길을 모르면 좋은 결실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기 부처님의 사실을 밝히는 가르침이 정법 500년 이후 희미해지자, 불교 속에는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얻은 좋은 사람과 좋은 세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힌두교의 환사상에 물든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밀교가 대두되어, 초기 부처님의 실상법과 인과법이 희미해지고 사실을 밝히는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모두 환으로 보니 선과 악에 대한 구별이 사라지고 선근 공덕에 대한 노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불교를 믿는 사회가 어두워지고 무기력해져 버린 것이다.


 


석가 부처님이 깨달음으로 법을 밝힌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참된 실상을 밝혀 인간을 축복하고 세상을 축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도에서 말법이 대두하여, 불교가 관념화 되면서 그러한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다.


 


인도 불교의 오염이 심해지자 부처님의 정법을 이어받은 달마는 동쪽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 불교가 크게 성하다는 말을 듣고 그쪽에는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전할 사람이 있는가 하고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대승 불교에 물들어 있었으며 중국 도교와 결합된 격의불교가 성행하였다. 그래서 불교에 유교, 도교의 내용이 첨가되어 많은 위경과 의경이 중국에서 제작되었는데 그러한 대표작으로는 노자화호경, 부모은중경, "대범천왕문불결의경'  등이 있다.



부처님은 사람들이 참된 진실을 깨우쳐 바르게살기를 원했다. 사실과 이치에 따라 바르게 사는 삶 속에 진실이 있고 바른 길이 있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있고 인간을 완성시키는 길이 있었다. 존재하는 일 속에 모든 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상법이나 유법(有法)이라고 했으며, 초기불교의 가장 큰 종파를, 있는 일을 설명하는 부파라고 하여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의 무지를 깨쳐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가장 큰 공덕으로 봤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곧 다시 배가 고프기 때문에 세상에 별 도움이 안되고 부담만 되지만, 한사람을 깨쳐서 스스로 자립하고 좋은 삶을 살아가는 능력을 지니게 하면, 그 사람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상과 이치를 깨우치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공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양무제가 수많은 절을 짓고 수많은 스님들을 먹여 살린 공덕에 대해, 그 스님들이 부처님의 참된 진리를 모른 채 인간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변질된 중국 불교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달마는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이에 대해 자기들 식으로 해석하여,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유위공덕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공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사실과 이치로 살펴볼 때 맞지 않은 말인 것이다.


 


양무제의 공덕행이 좋은 공덕이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정법을 세상에 전하는 절과 스님을 양성하여 세상을 밝혀야 하는데, 그들이 말법에 젖어 미신과 구복을 전하는 말법를 전하고 있었으니 세상에 복이 되기는커녕 악만 짓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니 아무런 공덕이 없는 무소공덕인 것이다.


 


지금 선 불교에서는 달마를 동방 선종의 시조라 말하지만, 그러나 그분이 보여 준 행적은 선사가 아니라 정법을 소유한 분으로서의 진실한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그분이 진실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세상의 명예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홀로 토굴 속에 앉아 9년을 면벽하고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중국 불교의 거짓됨을 보았기 때문에 황제에게 아부하지 않았고 중국 불교에 협조하지 않고 홀로 지내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벽을 보고 돌아앉은 것이다.


 


지금 달마가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달마어록(관심론(觀心論), 혈맥론(血脈論),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은 도교 관련 내용이 나오고 후대의 선종 관련 단어들이 나와, 후대에 달마를 내세움으로써 선종의 권위를 높이려는 위작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니 그분을 선종의 초대종사로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사실과 이치를 밝혀 좋은 원인을 지음으로써 선근공덕을 쌓아 해탈에 이르라는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과, 모든 것을 무로 보고 환으로 보아서 일체가 고통이니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마음자리가 본래 빈 것을 깨달아 한순간 깨달음에 이르라는 참선법은, 하늘과 땅처럼 전혀 정반대의 길인 것이다. 따라서 어찌 정법을 가지고 홀로 외로이 살다가 죽은 달마가 대승불교의 선종의 초조가 될 수 있으며 어찌 참선을 통하여 화두타파를 한다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 선불교는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라 인도의 선정법에 중국 도교의 수행법이 가미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조사선의 족보인 전등록에는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마하가섭이 선종을 개창한 1대조로 되어 있고 용수(나가르주나)를 제 14대조로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내민 연꽃 하나에 미소를 지었다는 마하가섭의 이야기는 중국에 와서 지어진 "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 실린 것으로 위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니 근거가 없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대승불교를 확립한 용수나 마명이나 마두반두인 세친같은 학승들도 그들의 저서 속에는 선이 언급조차 되지 않지만 이들이 전부 조사로 나온다. 따라서 중국 선종은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참선으로 한순간 깨달음을 얻는 조사선이 가상 속에 지어진 것이라면, 화두를 잡는 간화선은 그 유래조차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화두라는 방법의 수행법을 누가 만들어 그것만 깨치면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인가를 했는지, 그것을 어떤 깨달은 자가 그것으로 인해 세상의 밝히는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무 것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오늘날 선가에서는 화두만 깨치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자기들끼리의 리그를 벌이며 공리공담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불교는 달마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육조혜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육조혜능이 들어섬으로부터 선불교는 초기 불교의 사실적인 인과법과 이별하고 한순간 마음을 깨침으로써 막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중국 특유의 참선법을 확립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선불교는 영적 오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게 되었다.


 


그것은 선불교의 토대를 세운 육조혜능의 정체 때문이니,


그에 대해서는 이미 써놓은 다른 파일을 참고하기 바란다.





> > > 안녕 하십니까 선생님 > 중국 양무제와 달마 사이의 "소무 공덕 " 일화에서 > "내가 절도 많이 짓고 시주도 많이하고 불경도 편찬 하는 등 > 많은 일을 했는데 공덕이 있겠소?"하고 묻자 "조금도 공덕이 없다" > 고 했다는 이야기에서 "소무 공덕"이라 한 이유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바른 원인을 > 지으면 공덕이 되고 양무제가 하는 행동은 전혀 공덕을 짓는 원인이 아니었다고 > 말을 한 것을 보면 달마 대사는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인 진법을 알고 있다는 뜻인데 > 어떻게 알고 있었으며 어떤 인물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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